격동하는 재벌/고합그룹

“최고는 최고만 상대한다”

(사진/독일 빌스테트에 있는 엠텍 마그네틱사 공장 전경.)

“하이 하모니(High Harmony).”

장치혁 고합그룹 회장은 올들어 그룹명인 고합(高合)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영이념을 새롭게 단장했다. 고합의 창업주인 장 회장은 “기업과 기업 간의 경쟁에서 벗어나 최고와 최고가 서로 만나 진정한 시너지 효과를 창 출함으로써 21세기의 주인공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이 하 모니’는 “협력경영”이라는 장 회장 특유의 경영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 . 장 회장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기업세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올바른 기업경영은 경쟁기업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협 력경영을 통해서 새로운 부를 창출한 뒤 서로 더 큰 부를 나누는 것”이 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장 회장이 평소 그룹 임직원들에게 대우의 세계 경영을 배우라고 강조하는 것은 김우중 회장과의 친분과 함께 그룹 경영 전략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자연스런 결과로 보인다.

재계21위, 올 매출목표 5조원

고합은 66년 장 회장이 자본금 1천만원으로 고려합섬(현 고합)을 설립한 지 30여년 만에 석유화학과 화학섬유(화섬)를 주력으로 하는 국내 굴지의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일개 화섬업체로 출발한 고합은 곧바로 국내시장에 서 일본제품을 밀어낸 데 이어 76년에는 미개척분야였던 나일론 중합플랜 트를 최초로 국산화하는 등 사세를 빠른 속도로 신장시켰다. 70년대 말부 터 “기초화학에서 정밀화학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석유화학부 문에 뛰어든 고합은 80년대로 넘어오면서 도약기를 맞는다. 80년 화섬 원 료인 PX와 OX공장 준공을 토대로 82년 고려합섬에서 석유화학부문을 떼내 고려종합화학을 설립했고, 88년에는 PX와 폴리에스터 섬유의 중간단계인 PTA를 생산하는 고려석유화학을 세웠다. PX→PTA→폴리에스터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이룬 것이다. 89년 3월 장 회장의 그룹회장 취임과 그룹경 영체제 도입을 계기로 고합은 사업범위를 더욱 넓혀 이제 그룹 영역은 석 유화학과 첨단섬유, 정보통신, 금융, 유통, 건설 등으로 확대됐다. 현재 계열사 14개, 종업원수 3천5백명(해외부문 제외)으로 재계 21위(자산 기 준)에 올라 있다. 올해 그룹 매출은 지난해의 3조9백억원보다 2조 가까이 늘어난 5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사진/고합은 러시아에서 대규모 농업합작사업도 펼치고 있다. 콩 수확 장면. )

21세기 그룹 경영전략인 글로벌 인테그레이션(세계 일류기업과의 협력경 영을 통한 경쟁력 확보)에 성공하려면 먼저 고합 스스로 그 자격을 갖추 어야 한다는 것이 장 회장의 생각이다. 장 회장은 “협력경영은 국경없는 글로벌 경쟁을 전제로 한 연합과 결합이기 때문에 세계 제1의 경쟁력을 목적으로 한 협력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제1의 파트너와 상대 가 될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회장의 그 첫 시도가 지난 87년 전략경영계획의 수립으로 시작된 구조재구축사업이 다. 창립 30주년이기도 한 지난해 1월 10년 만에 완공된 울산 구조재구축 공장 1단지는 기존 콤비나트나 수직계열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 단지 안에 여러 공장을 파이프로 연결해 석유화학, 수지, 원사 등을 일관생산 한다는 새로운 개념에 의해 건설됐다. 고합은 “공정개혁과 자동화, 대형 화, 정보화, 물류합리화, 고속화를 결합해 비용절감과 품질혁신을 이룸으 로써 전천후 종합경쟁력을 갖추게 됐다”고 자평한다. 올해 안에 울산 제 2단지가 완공되면 PX, OX, PTA, 수지, 화섬 등 총 3백만t 이상의 생산체 제를 갖춰 동일단지 기준으로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오랜 경기 침체와 기아사태, 비자금 사태 등으로 국내 굴지의 대그룹들까지 휘청거 리고 있는 실정에서 고합그룹이 별탈없이 제길을 가고 있는 비결은 남보 다 앞선 이런 구조조정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엠텍 마그네틱, 황금알 거위를 잡다

고합은 구조재구축을 기반으로 세계 일류기업들과의 활발한 협력경영을 펴고 있다. 엔지니어링플라스틱 분야에서 세계 톱기술을 보유한 네덜란드 악조사와 합작으로 설립한 고합엔프라, 미국 뉴욕라이프사와 손잡은 고합 뉴욕생명보험, 정보통신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IN C사에 대한 지분참여, 중국 우전부(郵電部)와 합작설립한 경고종합통신설 비유한공사, 미국 제1의 환경관련 업체인 IT사와의 합작회사 설립 등이 모두 그 사례들이다. 특히 INC사는 올 8월 일반 전화선을 통한 초고속 데 이터 송수신 기술 관련 사업부문을 팔아 1천억원이 넘는 거액을 고합에게 안겨 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단독 해외진출도 활발해 중국 칭다오(靑島) 에 짓고 있는 연산 6만t 규모의 폴리에스터 공장이 곧 가동에 들어가고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에서도 해외생산기지 건설이 진행중이다.

지난해 말 성사된 독일 바스프 마그네틱사(엠텍 마그네틱사로 이름 변경) 의 인수는 고합의 글로벌 인테그레이션 전략이 낳은 최대 개가였다. 세계 자기테이프시장에서 일본의 소니와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엠텍 마그네 틱은 올 매출액이 10억달러(약 9천여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고합이 올 매출목표를 지난해보다 60% 이상 늘려잡을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다 . 더욱이 지난해까지만 해도 적자를 면치 못했던 엠텍 마그네틱은 올 상 반기 70억원이 넘는 흑자를 기록했다. 그룹의 한 임원은 “올 전체로 고 합의 인수자금에 버금가는 세전이익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해외업체를 무리하게 인수했다가 크게 경을 치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더욱이 엠텍 마그네틱의 광범위한 제조 ·판매망은 고합의 세계시장 진출에 교두보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엠텍 마그네틱의 독일내 지주회사인 고합 엠텍 홀딩사의 방상길 사 장은 “엠텍 마그네틱은 독일, 프랑스, 브라질 등 3개국에 제조·판매법 인, 오스트리아, 벨기에, 싱가포르, 홍콩 등 6개국에 판매법인, 그외 30 여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또 고합은 엠텍 마그네틱의 원 료인 베이스 필름을 전량 공급하게 돼 꿩먹고 알먹는 식의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됐다. 한마디로 고합으로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은 것이다.

정보통신·생활문화도 전략사업으로

장 회장은 2000년대 그룹매출 10조원 달성이라는 그룹 비전을 이루기 위 해 기존의 에너지 및 신소재사업과 함께 정보통신, 생활문화사업을 3대 전략사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보통신부문에서는 INC사와의 협력경영에 서 한발 더 나아가 지난 94년 전자통신기기 및 부품제조업체인 이스턴전 자통신(현 KNC)을 인수했다. KNC는 디지털 CATV, 주문형비디오, 인터넷, 원격교육, 일반전화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FSN시스템을 개발한 데 이어 인터넷망을 이용한 인터넷폰 및 인터넷 서비스 프로바이더 사업 도 전개하고 있다. 또 종합데이터 음성다중시스템과 디지털전송장치 등을 생산하고 있고 국제전화사업의 제3사업자로 참여하는 데도 성공했다.

지난해 9월 패션전문회사인 FCN의 설립은 생활문화사업 강화의 일환이다. FCN은 숙녀복 브랜드 예싱(YESING)과 유니섹드 모드의 보브(VOV)를 앞세 워 올해 전국에 40개 매장을 확보하고, 2000년에는 이를 2백여개로 확대 할 계획이다. FCN은 대기업 계열사이면서도 삼성물산이나 엘지패션과 같 은 보급형 브랜드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거부하고 신세대를 겨냥한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중소기업적 경영전략을 앞세워 불황한파가 거센 국내 패 션업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장 회장은 북방사업에도 집념이 대단하다. 그는 유럽연합, 북미자유무역 지대 등 세계 각국들이 지역경제블록을 만들어 배타적인 경제권을 형성하 고 있는 데 대해 한국은 북한과 일본, 중국, 러시아 나아가 미국을 포함 하는 ‘동북아경제권’을 형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재계에서 북방통으 로 불리는 장 회장은 지난 95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남북경협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재계의 대북경협 창구구실을 맡고 있다. 장 회장은 한·중 수교에도 일조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년대 초부터 고합물산 등 계 열사들을 통해 대 중국 교역을 하면서 중국 내 실세들과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장 회장은 이를 토대로 한·중 수교를 앞두고 두 나라 고위관 계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민간외교에 큰 몫을 한 공로로 92년에 정부 로부터 수교훈장을 받기도 했다. 장 회장은 지난해에는 러시아에서의 활 발한 경제활동으로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우호훈장 을 받았다. 고합이 러시아에 대규모 농업개발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북방사업을 통해 장 회장이 축적한 보이지 않는 자산 덕분이다. 고합은 지난 95년 러시아 아무르주와 연해주에 농업합작회사를 세우고 오는 99년 까지 2억8천만평 규모의 농축단지를 조성해 콩, 밀, 보리, 귀리 등을 생 산할 계획이다. 장 회장은 또 사할린 지역의 석유-가스전이 2000년대 초 반부터 한국을 비롯한 극동의 주요 석유-가스 공급원이 될 것으로 장담하 면서 자원의 세계적 보고인 이 지역의 석유-가스개발사업에 끈질긴 집념 을 보이고 있다.

“북쪽 자존심 다치게 말자”

장 회장은 평소 남북경협은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되고 철저히 보안을 유 지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또 북쪽의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론이다. 이처럼 북한의 입장을 존중(?)하는 장 회장의 자세 때문인지 그는 북한에서는 남한 기업인 중 그 누구보다도 높은 인기 와 신뢰를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회장이 북방경협에 관심이 많은 것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평북 영변에서 태어난 그의 가계 및 출신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장 회장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였던 산운(汕耘) 장도 무 선생이다. 산운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에서 단채 신채호 선생과 항일 의 필봉을 날카롭게 휘둘렀고 그후 북간도로 망명해 만주의 연해주와 블 라디보스토크를 넘나들며 애국활동을 했다. 이런 장 회장이 만주와 러시 아지역으로의 진출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른다.

고합의 후계 경영구도가 어떻게 짜여질지도 관심거리다. 장 회장의 나이 가 올해 66세로 아직 한창 일할 때이지만 슬하에 딸만 둘을 두고 있기 때 문이다. 지난해 국제결혼을 한 장녀 호정(29)씨와 신부수업 중인 차녀 호 진(26)씨 모두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어 앞으로 큰 변화가 없는 한 장 회장의 뒤는 사위나 전문경영인이 이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장 회 장은 은퇴 뒤 경영권 승계문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전 혀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룹의 설명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