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검찰, 위기냐 기회냐

(사진/10월14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장에 나와 선서하는 김태정 검찰총장. 그는 14시간 내내 석고상마냥 굳어 있었다.)

“국가운명이 내 어깨에 걸렸다. 모든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경거 망동할 수 없다.” 김태정 검찰총장이 지난 10월16일 밤 자택으로 불쑥 찾아온 몇몇 기자들을 문전박대하며 한 말이다. 평소 사람 좋아하기로 소 문난 김 총장이 요즘은 외부인과의 접촉을 일체 피하고 있다.

외부인과 접촉 피하는 김 총장

지난 14일 국회 법사위의 대검 국감에서 김 총장의 얼굴은 14시간 내내 석고상마냥 굳어 있었다. 여야간의 공방에서 웃음을 참기 어려운 대목들 이 종종 연출됐지만 안면근육이 단 한번도 풀리지 않았다. 저녁도 거른 채. 이 자리에서 김 총장은 “전국의 모든 검사들이 제 말 한마디 한마디 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을 표현했다.

김 총장이 긴장하고 있다. 한 검사는 “정권재창출이냐 정권교체냐가 투 표에 앞서 검찰총장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긴장의 배경을 설명 했다. 검찰 고위간부는 “이번에 잘못하면 앞으로 30년은 오욕을 씻어낼 수 없다”라며 “위기상황”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선 검사들 사이에는 ‘위기가 곧 기회’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권 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일궈낼 수 있는 호기라는 것이다. 또 검찰 내부에서 는 김 총장이 수차례 되풀이한 ‘면밀한 검토와 신중한 결정’ ‘통상적 인 절차에 따른 처리’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의혹 수사에서 검 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외길’이라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 일 치를 보고 있다. 일부 검사들은 두달 전 김 총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총 장이 됐더라면 진행상황이 아예 달라졌을 수 있다며 김 총장의 ‘심지’ 를 칭송하기까지 했다.

검찰의 이런 분위기는 신한국당이 고발장을 접수한 16일 이후에도 이어져 , 주임검사 배정에서 PK나 경기고 또는 호남출신 검사들은 되도록 배제하 려고 애쓰고 있다. 대검에 접수된 고발장을 서울지검에 내려보내 정식으 로 입건하는 절차도 “너무 빠르다고 할까봐” 하루이틀 묵히며 그야말로 통상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 최대한 신중하고 중립적인 자세를 보여 어느 한쪽에서도 책잡힐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중립성에 반대하는 견해도 아주 없지는 않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비리의 진상을 미리 알고 범죄성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수사에 나선다면 수사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며 “지금은 사실상 수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또다른 ‘역차별’”이라고 말했다. 다른 검사는 “이번 수사도 범죄의 사실 관계보다는 대선을 앞둔 정치적 상황과 경제 계에 끼칠 영향, 여론의 향배 등 수사 외적 요소가 결정적 변수가 되고 있다”며 “앞만 보고 가는 수사와는 거리가 멀다”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 한 부장검사는 “김 총재 비자금 잔액이 1백억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된 다면 무조건 전면수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순용 대검 중수부 장도 이런 분위기를 읽었는지 “수사가 시작되면 끝은 어딘지 모른다”며 “아무리 우리 식구지만 수사에 간섭하면 나중에 ‘브레이크를 걸더라’ 고 폭로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권은 상대적 독립성의 문제”

현재 검찰 입장이 중립적이냐 아니냐는 논의를 떠나 “검찰권은 절대적 독립성이 아닌 상대적 독립성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검찰 내에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한 검사는 “우리가 흔히 검찰의 정치적 중립 을 이야기할 때 동경지검 특수부가 다나카 총리를 구속기소한 사례를 많 이 드는데, 일본 검사들을 만나보니 ‘이미 정치권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 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귀띔해주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국 일 본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집권당 내 여러 파벌이 서 로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가는 정치적 상황에서, 검찰의 입지가 상대적으 로 넓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른 검사도 “우리처럼 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독점해온 상황에서는 검찰 의 중립성도 뒤틀릴 수밖에 없다”며 “지금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 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세력간의 균형이 이뤄졌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그 런 정치지형이 펼쳐진다면 검찰도 자동적으로 중립화될 것”이라고 설명 했다.

김의겸 기자/ 한겨레 사회1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