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국가기관, 당신들의 사유물!

(사진/`DJ비자금 폭로' 신한국당 3인방. 강삼재 사무총장, 정형근 의원, 이사철 대변인(왼쪽부터) .)

‘DJ비자금설’은 당장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 마 찬가지로 국가기관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국가기관의 생명이라 할 국민의 신뢰를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잃게 한 것이다. 그것은 김 총재에 대한 신한국당의 비자금설 폭로과정에서 정보기관이나 수사, 금융기관 등 국가기관들의 개입 증거가 일부 밝혀지고 있고 또 대다수 국민들은 확인 여부와 관계없이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물증으로 꼽 히는 증권감독원의 옛 평민당 계좌 조사 사실은 이들에게 그렇게 중요하 게 다가오지 않는다. 으레 그러려니 믿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분명히 중요한 구실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기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어느 특정 정파의 정치적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원론이다. 더구나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권력이 사유화되는 경우 권력기관은 특정정파의 선거운동 기구로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국민은 그저 들러리일 뿐이다.

이번 비자금설 폭로전에서 폭로내용의 진위여부와 함께 그 자료의 입수과 정이 해명돼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기관이 특정정당의 정 치적 도구로 사유화됐다면 그 자체로서 민주주의의 기본틀을 뒤집는 것이 기 때문이다.

물론 신한국당은 이번 폭로가 “수많은 시민과 금융계 인사들의 제보”라 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말없는 다수 국민의 ‘양심선언’이라는 것이 다. 신한국당은 나아가 “중요한 것은 자료내용이지 출처가 아니지 않느 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신한국당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민은 거의 없다. 금융실명 제 실시로 접근이 철저히 봉쇄된 개인의 예금계좌에 대해, 그것도 사돈의 팔촌까지 이르는 수백계의 계좌를 시민들이 제보했다는 신한국당의 주장 은 저질 코미디로 치부되는 것이다. 사실 국가기관이 몇달 동안 총동원되 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게 금융과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 다.

사실 지금까지 각 매체를 통해 비자금설의 배후와 폭로과정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관련기관 종사자뿐 아니라 과거 정보·수사기관에 종사했 던 사람들의 제보가 잇따른다는 국민회의는 관련기관들의 개입 커넥션(계 통도)까지 그려 놓고 있다. 이 계통도에는 관련기관들의 고위관계자 이름 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국민회의가 작성한 ‘비자금설 조작폭로사건 권력기관 개입 계통도’에 따르면 이번 폭로전의 최상층부에 청와대를 올려 놓고 있다. 어떤 식으로 든 청와대가 배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어느 정도 관련됐는지 여부에 대해 다소간의 이론이 있을 뿐이다.

‘청와대-안기부-신한국당’ 핫 라인

지금까지 제기된 관련기관의 개입과정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는 청와대가 사실상 비자금설 폭로전의 기획과 주연을 맡았을 것이라는 청와대 직접개입설이다. 청와대가 컨트롤 타워(통제탑)로 검찰과 국세청, 은감원, 증감원 등을 직접 지휘해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설 관련 계좌를 수집해 신한국당의 ‘DJ저격수’ 강삼재 사무총장을 하여금 폭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청와대가 직접 나서지 않고 검찰이나 안기부 등을 통해 관련자료를 보고받아 신한국당에 넘겨줬을 것이라는 간접개입설이다 . 검찰이나 안기부 등이 국세청이나 은감원, 증감원 등을 동원해 관련자 료를 수집했고 이것이 신한국당에 전달됐다는 시각이다.

국민회의에서는 둘째 경우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 관련기관들을 직접 동원하는 경우에는 ‘범정부적’ 차원의 개입을 감수해야 하는 등 위험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직접개입설은 일단 그 가능 성을 낮게 보고 있다. 검찰이나 안기부 등이 금융기관의 파견요원들을 활 용하는 경우에는 은밀히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데다 문제가 될 경우 꼬 리를 자르기도 쉬운 이점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국민회의가 지난주 국정감사 기간 동안 관련기관들에 대해 집중 추궁한 내용도 검찰과 안기부가 은감원과 증감원, 국세청 등을 동원해 수집한 자 료를 청와대에 보고하고, 청와대가 다시 이 자료들을 신한국당에 전달해 폭로전이 전개됐다는 시나리오를 근거로 하고 있다. 지난 15일 안기부에 대한 국감에서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는 국가기관의 비자금설 폭로 개입과 관련한 ‘계통도’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박 총무가 들고 나온 계통도에 따르면 ‘청와대 배00-안기부 임00 이00 이00-신한국당 강삼재’로 이어 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PK 또는 TK 출신 인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청와대 배씨는 경남고 출신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고교 후배이다. 검사출 신으로 김영삼 정부 들어 사정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안기부 임씨는 현재 정책실장으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인맥으로 꼽혀왔다. 대구 영남 고를 나온 김 전 차장이 아낀 안기부 내 ‘영남고 4인방’의 대표주자라 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안기부 내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김 차장에 의해 발탁돼 서울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려온 실 세로 꼽히고 있다. 안기부 이씨는 경북고 출신으로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 왔으며, 전 인천지부장을 지낸 것으로 국민회의 관계자들은 주장하고 있 다. 물론 당사자들은 “전혀 관련이 없다”며 펄쩍 뛰고 있고 권영해 안 기부장도 “내부 감찰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민회의쪽은 이 계통에 대한 심증을 굳히고 있다.

강삼재는 10월6일 누굴 만났는가

개입의혹이 사실로 밝혀진 경우는 증권감독원이다. 지난해 12월12일 옛 평민당 계좌를 증감원이 추적한 사실이 공문을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증감원은 96년 12월12일 대한투자신탁에 대해 ‘특검 517-398-10’으로 돼 있는 공문에서 02472901번 입금수표에 대해 관련계좌 및 연결계좌의 매매거래 내역 사본 등 자료를 대한투자신탁에 요구했다. 계좌번호는 01- 13-00485-8이다. 이는 바로 평민당이 개설했던 계좌 가운데 하나였다. 국 민회의는 원장의 특명사항을 검사하는 검사총괄국 특수검사과에 강한 의 혹을 보내고 있다. 박청부 증감원장이 평민당 계좌와 관련해 “특명을 내 린 적이 없다”고 대답함에 따라 수사기관의 요청으로 파견된 증감원 직 원들이 검찰의 지휘를 받아 직접 조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증감원의 개입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은행감독원에도 의혹의 눈길 이 쏠리고 있다. 국민회의 김민석 의원은 지난 9일 국감에서 “은행감독 원 일부 검사역들이 청와대 등의 지시를 받아 김 총재와 이인제 전 경기 지사의 자금내역 조사를 해왔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신한국당 이 주장한 김 총재 친인척 비자금 예치내역 명단에 포함된 윤흥렬씨도 최 근 “지난 95년 또는 96년 초 김대중 총재에 대한 ‘20억+알파설’이 제 기됐을 무렵 동화은행에서 은행감독원이 나의 예금계좌에 대한 입금내역 조회를 협조해 달라는 공문이 왔던 것을 서면으로 알려온 적이 있다”고 말해 은감원이 비자금 추적에 동원됐음을 증언했다.

국세청의 경우에는 신한국당이 김 총재의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한 김 총 재 처남인 이형택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이 “94년부터 내가 거친 모든 지 점은 국세청 조사가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혀 국세청의 개입의 혹을 제기했다. 국세청은 법원의 영장없이도 개인이나 법인의 은행계좌를 마음대로 조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금추적에 자주 이용되는 기관으로 꼽힌다. 국세청에선 특히 ‘하명사항’을 주로 다루는 조사국이 의혹의 대상이다.

이런 기관들을 실무적으로 동원한 기관은 역시 검찰이라는 게 국민회의의 주장이다. 신한국당이 폭로한 일부 계좌가 이미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수 사사건 때 나왔던 계좌인데다 ‘DJ비자금 대기업 명단’은 검찰의 수사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안기부의 구실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인물과 정보까지 거론되고 있다.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폭로 전날인 6일 밤 11시 서울 강남의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안기부 책임 자를 만났으며, 신한국당 폭로문건 작성에 안기부 직원들이 참여했다고 국민회의는 주장하고 있다.

국민적 불신에 둘러싸인 금융실명제

국민회의는 검찰과 안기부의 배후에는 바로 청와대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 고 있다. 지난 17일 청와대 비서실에 대한 국감에서 국민회의 한영애 의 원은 “신한국당의 폭로전은 지난 96년 12월경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 석 등의 주도로 만들어진 청와대의 대선전략 보고서의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다”며 “신한국당의 방대한 폭로자료는 안기부 국세청 은행감독원 등 의 협조없이는 입수가 불가능한 자료이며 이들 기관은 청와대의 재가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가기관이 특정정파에 의해 사유화될 때 정치공작 논란뿐 아니라 정부 정책마저도 불신을 받게 된다. 이는 이미 예금자의 비밀보장을 생명으로 하는 금융실명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최근 주가폭락의 원인 중 하나로 신한국당의 폭로로 자금추적을 우려한 증권투 자가들이 증시에서 돈을 빼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권력의 사유화’는 바로 독재로 연결되는 게 우리의 경험이다. 권력의 사유화는 이를 이용한 세력뿐 아니라 결국 국가전체를 망치게 한다는 교 훈을 되새길 때이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