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YS, 권력 사유화의 극치

(사진/안기부 국정감사 모습. 안기부는 `문민정부' 아래서도 권력의 사병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지우지 못했다.)

그동안 역대 정권들은 정권장악 과정에서부터 군이나 정보·수사기관들을 동원해왔다. 쿠데타를 통한 탈법적 정권탈취든 선거를 통한 합법적 정권 장악이든 정권 출발의 밑바탕에는 항상 ‘권력의 사유화’가 자리잡고 있 었다.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정권기반의 강화를 위해 국가기관을 정치적 으로 이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임기제 농락한 검찰총장 중도하차

김영삼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 군사정권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정부 의 권력기구의 사유화도 인사를 통해 이뤄졌다. 김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사정과 개혁을 앞세워 권력주변의 인물교체를 하면서 철저하게 PK(부산·경남)출신 인사들로 채웠다. 특정지역출신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한 인물교체는 결국 ‘인사를 통한 권력의 사유화’ 과정의 전형이었다. PK정권이라는 말 자체가 ‘권력의 지역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기구의 사유화 과정에 인사가 어떻게 활용됐는가는 임기제 총수의 중 도하차에서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 차례에 걸친 임기제 검찰총 장의 중도퇴진이다. 김 대통령은 취임 초인 지난 93년 3월 전임 노태우 대통령이 3개월 전에 임명한 김두희 검찰총장을 법무장관에 ‘영전’시키 는 방식으로 중도하차시켰다. 후임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TK출신 박종철 검찰총장도 93년 9월 공직자 재산 공개 파문에 휩쓸리며 6개월 만에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나야 했다. 두명의 검찰총장이 잇따라 중도하차한 것 은 검찰총장의 임기제(임기 2년)를 유린한 것이다. 두명의 희생양을 통해 마침내 김 대통령은 검찰총장직에 PK출신의 김도언 총장을 앉힐 수 있었 다. 그뒤 검찰은 철저히 정권의 하수인 구실을 했다. PK 검찰공화국이라 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김도언 총장은 총장을 그만둔 지 1주일 만에 신 한국당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임기제의 취지를 스스로 유린하기도 했다. 임기제 총수의 중도하차는 검찰총장에 그치지 않았다. 이회창 감사원장이 임기 4년의 감사원장직을 다 채우지 못하고 정권의 불순한 의도에 따라 국무총리로 옮기기도 했으며, 김덕주 대법원장도 김 정권 초기에 재산파 동 와중에서 타의로 물러나야 했다. 무엇보다 권력으로부터 독립이 가장 중요한 감사원장과 3권분립의 한축인 사법부마저 권력의 입김에 의해 총 수의 운명이 좌지우지됐다. 입법부 수장인 박준규 국회의장의 중도사퇴도 이유야 어떻든 입법부의 독립과 관련해서는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다. 날 치기를 거부한 이만섭 국회의장의 교체에 이어 민주계 출신의 황낙주 김 수한 국회의장의 취임 이후 잇단 날치기는 입법부도 인사에 의해 얼마든 지 권력에 예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사를 통해 핵심 권력기관에 ‘자기 사람 심기’를 마친 김 정권은 철저 하게 권력기관을 정권유지에 활용해 왔다. 김 정권이 권력기관을 어떻게 사유화했는가는 크게 3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선거에 활용하기 위한 국 가기관 동원과 정적 제거를 위한 국가기관의 이용, 권력기반 강화 및 정 치정보 수집을 위한 국가기관의 활용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선거 과정에서의 국가기관 동원

선거국면을 여당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국가기관들은 매번 동원됐다. 이 번 대선에서도 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국민회의는 안 기부 이아무개 실장이 지난 10월5∼8일 전국의 안기부 지부를 순방한 자 리에서 “김대중은 안 된다. 두고 봐라”고 강조했다는 제보를 받고 안기 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해놓고 있다. 지난 95년에도 안기부는 지방자치제 실시를 연기하기 위한 음모의 공문을 보낸 사실이 밝혀져 당시 안기부장 이던 김덕 전 통일원장관과 안기부1차장 정형근씨가 물러나기도 했다. 지 난 92년 대선 때는 간첩 이선실 사건수사로 북풍을 주도했다.

선거 때마다 논란을 빚는 야당에 대한 편파수사도 권력기관의 공정성과 관련해 항상 비판의 대상이 돼왔다. 경찰의 편파적인 단속과 검찰의 편파 적인 수사 및 처벌은 수사기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불러왔다. 실제로 지난해 4월 총선 당시 검찰은 국민회의 국창근 후보에 대해 야당의 공천 헌금의혹과 관련, 요란스럽게 수사를 벌였으나 선거 뒤 흐지부지시켰다. 최근에는 외무부마저 선거에 관여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3일 지난해 4월 총선 당시 외무부 임성준 미주국장이 미 국무부로 비밀전문을 보내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을 선거 이후로 연기해줄 것을 요청한 사실을 폭로했다. 임성준 미주국장은 미 국 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토머스 허바드 부차관보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 김영삼 대통령이 어려운 선거에 직면해 있다.… 한국 내 보수세력은 연락 사무소 개설을 정치적 쟁점으로 사용할지 모른다.… 따라서 연락사무소는 내년 초부터 4월까지의 선거 이전엔 개설되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는 것이다. 국민회의는 이에 대해 “외무부마저 국내정치에 개입했다는 증거”라며 당시 외무부 관련책임자의 책임을 촉구했다.

◇정적 제거를 위한 국가기관 이용

(사진/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은 대통령 차남 현철씨에게 정기적으로 정보보고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

야당이나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한 국가기관의 활용도 권력의 사유 화와 관련돼 논란이 된 부분이다. 이는 김 정부 초기에 구속됐던 인사들 이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정치보복과 관련해 검찰은 늘 국민들의 손가락질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5·18 광주학살과 관련한 전두환·노태우씨의 처벌에 대한 검찰의 이중적 태도를 꼽을 수 있다. 검찰은 김영삼 대통령이 ‘광주문제는 역사 에 평가를 맡기자’고 선언하자 5·18관련자들에 대한 불기소 결정을 내 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리면서 밝힌 변명이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전·노씨 처벌쪽으로 방 침을 바꾸자 검찰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 뒤집으며 전·노씨 처벌쪽으로 돌아섰다. 검찰의 입장번복에는 양심이나 정의의 논리는 찾아 볼 수 없고, 철저하게 정권의 논리에 따라 왔다갔다했다. 권력기관의 사 유화가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가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김 대통령이 평소 “검찰총장은 장관 20명하고도 안 바꾼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 기에 있다는 것이다.

93년 초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도 정치보복 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국세청은 93년 2월 포항제철에 대한 법인세 조사 를 통해 박씨가 포철 계열사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 특정범죄가 중처벌법상의 수뢰혐의로 검찰에 고발조처했다. 국세청은 박씨뿐 아니라 친·인척 등 다른 사람명의의 모든 재산목록을 공개했다. 물론 국세청은 일상적인 세무조사라고 강변했다. 당시 박씨 친·인척에 대한 재산목록 발표는 최근 신한국당의 김대중 총재 친인척 계좌발표를 연상케 한다.

최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관련된 각종 의혹들을 제기하는 안기부1차 장 출신인 신한국당 정형근 의원의 배후에는 항상 안기부의 그림자가 따 라다닌다. 정 의원은 올해 들어 오익제씨 월북사건과 관련해 ‘야당 정치 인 내사설’을 주장한 데 이어 최근에는 오씨와 김대중 총재의 89년 회동 과 국민회의의 당비납부 내역까지 폭로하고 나서고 있다. 이런 내용들은 안기부가 정 의원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한 입수하기 어려운 것들이 라는 점에서 안기부가 정 의원의 ‘개인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민회의의 ‘기획입북설’에 대해서는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안기부는 애써 정 의원의 안기부 수사기밀유출의혹 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있다.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국가기관의 사적 이용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국가기관의 사적 이용 사례로는 김현철씨에 대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의 안기부 정보보고의혹을 꼽을 수 있다. 김씨 는 메디슨 특혜의혹사건과 관련한 수사전말보고서도 정보·수사기관 등으 로부터 보고받는 등 국가기관을 ‘사병’처럼 활용했다. 지난 5월 김씨의 국정개입문제가 정치적 현안이 돼 있을 때 권영해 안기부장이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과 김현철씨를 워커힐호텔 빌라에서 만나 검찰 소환조사 대책 을 논의한 것은 안기부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전두환·노태우시절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는 안보를 책임진 군마저도 특정인의 사병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줬다. 전·노씨는 하나회 를 기반으로 정권을 탈취했고, 하나회를 통해 권력을 연장해왔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