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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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지난 10월3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슈퍼301조 항의 시위. 이번 일을 계기로 협상력과 로비력 부재라는 통상정책의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다.)
“한국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미국이 지난 10월1일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 문제를 슈퍼301조에 따른 ‘ 우선협상대상국관행’(PFCP)으로 지정한 배경에는 한국 자동차업계를 이 번에 잡지 못하면 안 된다는 미국 자동차업계의 우려가 짙게 깔려있다. 기아사태로 내환을 겪고 있는 지금이 공격적인 시설확장을 통해 세계시장 을 공략하고 있는 한국 자동차업계를 확실히 견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라는 판단인 것이다.
‘모든 요구’를 들고 나왔다
이번 한-미 자동차협상은 기본적으로 지난 95년 두 나라가 맺은 양해각서 (MOU)의 이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번 협상에 서 배기량에 따라 누진적으로 적용되는 자동차세의 인하, 관세 인하 등 세제와 관련된 새로운 요구를 들고 나왔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는 올해 초부터 계속된 미국의 협상 요구를 그동안 묵살했다. 하지만 미국의 요구 가 계속 집요해지자 지난 8월 서울에서 처음 협상을 시작해 미국이 우선 협상대상국관행으로 지정하기 전까지 모두 3차례 협상을 했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의 주된 요구는 현재 8%인 자동차 관세를 낮추고 미국 자동차업계의 주력인 중·대형 자동차에 불리한 자동차세제를 개편하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자동차의 저당권 설정 허용, 형식승인 간소화, 심지어 는 유럽 기준을 따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전조등 규격을 미국 기준으로 바 꾸라는 요구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요구’를 들고 나왔다. 협상 막 바지에는 그동안 거론하지도 않던 소비자 인식개선 문제까지 거론했다. 한마디로 미국 자동차업체들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한국에서 미국 차 판매가 크게 늘어날 수 있는 대책을 한국 정부가 시행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요구다.
미국이 이렇게 내정 간섭에 가까운 요구사항을 들고 나서는 데는 미국 자 동차업계의 위기감이 가장 주요하게 작용한다. 미국 자동차업계는 최근 한국산 자동차들이 인도네시아나, 폴란드 등 일부 나라에서 무서운 기세 로 시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을 불안한 눈길로 보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 서 한국자동차가 미국차들과 정면대결하고 있는 국면은 아직 아니지만, 미국 또한 이들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자동 차업계가 삼성의 승용차산업 신규진출과 함께 대대적인 시설확장에 나서 오는 2000년 6백만대 수준의 생산능력을 갖출 것으로 전망돼, 그대로 뒀 다가는 자칫 한국에 덜미를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지난 94년 이후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적용해보지 않은 슈 퍼301조 발동이라는 최강수를 들고 나온 데는 한국 자동차시장이 지극히 패쇄적이라는 인식이 의회 등 정치권에 널리 퍼져있는 것이 결정적인 구 실을 했다. “연간 1백50만대의 자동차가 팔리는 한국시장에서 미국 자동 차가 4천대밖에 팔리지 않는다는 현실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스탠 리 로스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말은 미국이 한국 자동차시장을 어 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역적자 78%가 대미 무역에서 발생
오강현 통상산업부 통상무역실장도 “이번에 미국 행정부에 슈퍼301조를 발동하라고 촉구한 미 의회 의원이 70여명인데, 이는 지난 95년 양해각서 체결을 앞뒀을 때 서명했던 숫자보다 훨씬 많은 것”이라며 “미국의 여 론이 그 어느 때보다 나쁜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 실장은 “올해는 미 국쪽에 특별한 통상쟁점이 없고 미 무역대표부(USTR)로서는 의회 등 정치 권의 동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로서도 미국쪽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도 없는 처지다. 미국의 의도가 한국 자동차산업 죽이기라는 것이 너무나 뻔하게 보이는 데다가, 대미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우리나라 전체 무역수지 에 엄청난 압박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까지 우리나 라 전체 무역적자 1백3억8백만달러 가운데 78%인 81억달러 정도가 대미 무역적자다. 우리나라의 대미 무역수지가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선 것은 이미 지난 94년부터지만, 전체 무역수지 적자에서 미국과의 교역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가 최고 수준이다. 가뜩이나 경제 상황이 나쁜 데다 가 기아사태까지 겹쳐 국내 자동차업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우리 정부가 끝까지 강하게 버틴 요인 중 하나다.
미국이 슈퍼301조를 발동했다고 해서 당장 우리나라가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12∼18개월 정도 다시 협상을 진행하고, 이 협상마저 결 렬되면 미국 정부가 보복조처를 강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지 않을 경우 품목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보 복관세라는 강력한 무기가 동원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로서는 훨씬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보복에 들어갈 경우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 무기는 세계무역기구( WTO)에 제소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일방적인 무역보복은 자유무역 확 대라는 세계무역기구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점을 걸고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나라의 주세가 위스키에 불리하다는 점을 세계무역기 구에 제소한 것처럼, 자동차 누진세를 문제삼아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앞으로 한-미 자동차협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험난할 전망이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데는 우리 정부의 시기를 놓친 안일한 대응과 국내시장 쟁탈전에만 빠져있는 자동차업계의 행태가 가장 큰 요인 으로 지적된다. 정부는 최근 들어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전과는 달리 강한 자세를 보였다. 미국이 한국산 디램반도체의 덤핑이 거의 사라졌고 컬러 텔레비전은 아예 미국에 수출도 되지 않는데도 반덤핑조처를 풀지 않자, 우리 정부는 즉각 두 문제를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했다. 이번 자동차협상 에서도 임창열 통산부 장관이 지난달 말 세제 개편과 관련된 것은 비록 우선협상대상국관행으로 지정된다하더라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공개 적으로 밝히는 등 강하게 버텼다.
큰소리에 걸맞는 치밀한 대응책 마련해야
정부의 이런 자세는 미국에 질질 끌려만 다니면서 국민들의 자존심까지 꺾던 그동안의 굴욕적인 태도에 비하면 분명 상당히 진전된 것이다. 문제 는 정부가 치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도 않고 큰소리만 쳤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정권이 바뀌면 내 알 바 아니다”는 식의 정권말기 증상이 공 무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번 자동차 문제를 계기로 우리의 통상정책도 취약한 협상력과 로비력 부재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극복하고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수립해 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신기섭 기자/ 한겨레 경제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