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정답없는 수수께끼 기아 해법

‘기아사태’ 해법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55만명의 생계가 걸려있는 데다 3개월째 정치·경제적 파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뚜 렷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논란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신한국당이 가장 난처한 입장이다. 사태 장기화에 따른 국민적 불안이 가 중되면서 집권당이 방관만 한다는 안팎의 비난여론에 맞닥뜨려 있지만 묘 책을 낼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지난 8월14일 이회창 대표가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을 방문해 “기아 회생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적극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시장원리 존중”을 내세운 정부쪽 반발과 “선거 를 의식한 한건주의”라는 야당의 공세에 무너진 뒤 여당은 엉거주춤한 입장을 보여왔다.


정부에 딴지 걸린 ‘해결사 이회창’

물론 지난달 30일 총재로 선출된 이회창 총재는 다시 한번 해결사를 자임 하고 나섰다. 지난 10월3일 창원한국방송공사 초청 토론회에서 “법정관 리보다 화의가 바람직하다”며 기아의 입장을 두둔했다. 4일 부산상공회 의소 간담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기업을 도산시키지 않고 회생시 키는 것”이라며 “화의에 의해 회생의 여지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것 이 옳은 길”이라고 ‘화의’쪽으로 가닥을 잡았음을 명확히 했다. 더욱 이 법정관리쪽으로 마음을 굳힌 강경식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정부에 대 한 공세도 강화했다. “불합리한 고집은 금물”이라며 “당정이 협의하고 절충해야 한다”고 압박한 것이다.

이 총재쪽 계산은 명확하다. 경제위기 극복에 앞장서는 모습을 통해 국정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지지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의도대로 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재정경재원쪽은 “현상황에선 법정관리 가 사태해결을 위한 최적의 방안”이라며 “정부 정책을 수정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맞서고 있고 제일은행 등 대규모 채권은행들도 법정관리쪽 으로 방향을 튼 상황에서 이 총재의 해법이 먹혀들 여지가 적은 것이다.

혼란스럽기는 국민회의도 마찬가지다. ‘준비된 대통령’을 주창해온 김 대중 총재는 그동안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하며 여당을 압박해 왔다. 그 핵심은 “방만한 경영책임을 묻고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처리돼야 하지만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기아를 살려야 하는 만큼 긴급 경영자 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와 채권단이 법정관리를 고집하는 상황에서 더이상 이런 해법만 주장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결국 국민회의쪽은 법정관리가 불가피해질 경우에 대비한 공세를 준비하 고 있다. 지난 9월29일 간부회의에서 그 단초가 드러났다. 이날 회의에서 법정관리를 전제로 협력업체에 대한 대규모 추가대출이나 조속한 3자인수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물론 김 총재가 3자 인수를 반대해온 점을 의식해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고 있다. 김 총재도 지난 3일 부산문화방송 주최 토론회에서 “채권단은 기아의 화의신청을 받으려 했 는데 정부가 압력을 가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정부쪽에 화살을 돌린 뒤 “화의 문제는 채권단과 기아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의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하지만 김원길 정책위의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3자인수”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 “당이 공식적으로 요구할 수 는 없지만 3자인수에 들어가면서 인수회사가 채권을 해결해주는 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김민석 부대변인도 “불가피하게 법정관리 에 들어가게 된다면 현실적 대안은 금융기관이 채권동결 상태에서 협력업 체를 살리기 위해 대규모 추가대출을 해주거나 조속하게 3자인수에 들어 가는 길밖에 없다”며 “우리당은 사태를 면밀히 주시하며 대책을 강구하 겠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3자인수 공식화에 따른 부담을 피하면서 정 치적 실리는 챙기겠다는 계산이다. 자민련도 화의를 통한 수습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조순 “경제논리가 기아 문제 푸는 해법”

민주당만이 3자인수라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경제대통령론’을 내세워온 조순 총재는 “자체해결 능력이 없으면 공개시장에 내다 팔 수 밖에 없으며 맡아서 잘 할 수 있는 기업을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은 한발 더 나아가 “표를 의식한 후보들의 무원칙한 정치발언을 통한 개 입을 중지하라”고 요구하며 타후보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죄고 있다. 권 오을 대변인은 4일 “김대중 총재가 3자인수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은 정치 적 파장을 두려워한 나머지 경제원칙을 저버린 구시대적 해결방식”이라 고 비난하면서 “고품질 경제정책을 위한 경제토론회”를 촉구하고 나섰 다.

55만명의 생계와 기아가 무너질 때 다가올 국민적 상실감에 대한 우려, 3 자 인수 주장은 곧 삼성에 대한 특혜로 비쳐지는 현실 속에서 정치권은 뚜렷한 대안없이 표류하고 있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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