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차범근 축구의 승리!

‘프랑스가 눈 앞에 보인다.’

한국 월드컵축구 대표팀이 ‘숙적’ 일본에 이어 ‘난적’ 아랍에미리트 를 잇따라 꺾고 프랑스를 향한 탄탄대로에 접어들었다. 본선진출을 위한 최종예선 8경기 가운데 절반인 4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끈 한국은 승점 12 점으로, 아랍에미리트(승점 7점)와 일본(승점 5점)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4년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프랑스 직행 티켓이 거의 손에 잡힌 셈이다.


‘빠른 원터치패스’가 핵심

애초 국내 축구계에서는 월드컵 4회 연속진출에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 았다. 그러나 차범근 감독은 이런 성급한 염려를 보란 듯 떨쳐버리고 그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차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맡은 것은 지난 1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9달 만에 거둔 성과다. 불과 10달 전인 지난해 12월 한국대표팀이 아시아선수 권대회에서 참패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차 감독의 성공은 눈부실 정도다. 그렇다면 차 감독의 무엇이 대표팀을 9달 만에 이렇게 바꿔놓은 것일까. 차범근 축구하면 맨먼저 연상되는 말은 ‘템포축구’다. 차 감독의 취임 일성이 템포축구였다. 속도전으로 월드컵 4회 연속진출을 이뤄내겠다는 게 차 감독의 구상이었다. 이 때부터 ‘차범근 축구는 템포축구’라는 등 식이 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사실 이 템포축구만큼 논란을 불러일으킨 용어도 없다. 지난 6월 코리아컵 대회에서 외국팀 감독이 “한국팀은 완급조절 능력이 부족하다 ”고 말한 것을 다음날 신문이 ‘템포없는 템포축구’라는 비판적 기사로 받은 것은 그 좋은 실례다.

템포축구는 그러나 공수의 완급을 조절하며 리듬을 타는 축구하고는 조금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빠르게 침투해 들어가는 쪽에 무게를 둔다. 단순 하게 말하면 그냥 ‘빠른 축구’인 셈이다. “현대축구는 누가 빨리 공간 을 확보하느냐에 승패가 달렸다”는 게 차 감독의 지론이다. 실제 독일에 서는 코치가 선수들에게 빠른 공격을 독려할 때 ‘템∼포∼’하고 외친다 고 한다.

그러면 실제 경기에서는 템포축구가 어떻게 나타날까. 차 감독은 ‘빠른 원터치 패스’를 템포축구의 핵심으로 꼽는다. 시종 주위 선수와 공을 주 고받으며 빠르게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게 템포축구의 뼈대라는 것이다. 차 감독은 한 선수가 공을 몰고다니면 질책을 쏟아낸다. “공을 원터치로 주고받으며 들어가는 것이 △상대수비를 혼란시키기 쉽고 △침착하게 경 기흐름을 읽으며 빠르게 공격할 수 있어 훨씬 안정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게 차 감독의 설명이다.

따라서 템포축구는 선이 굵고 체력이 뛰어난 선수와 어울린다. 차 감독은 잔기술보다는 90분 동안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고 뛸 수 있는 체력을 갖 춘 선수를 선호한다.


“재미없어도 이기는 축구 하겠다”

(사진/쾌조의 한국 축구는 차범근 축구의 결실이다.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차 감독. )

게임메이커를 따로 두지 않는 것도 템포축구의 특징이다. 차 감독은 그 이유에 대해 “한 선수에게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임무를 맡기는 것은 그 선수가 막힐 경우 대책이 없다”고 설명한다. 지난달 일본전이 끝난 뒤 “일본은 한 두 선수에게 공배급이 집중돼 그 선수가 막히면 힘을 잃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고 분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누구든 기회가 생 기면 원터치로 주고받으며 상대를 압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차범근 축구를 떠받치는 또다른 기둥은 실리축구다. 차 감독은 지난 1월 취임 당시부터 기회있을 때마다 “재미없다는 얘기를 들어도 이기는 축구 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 기본 뼈대는 탄탄한 수비에 무게를 두는 축구 다. 공격은 그 다음이다. “수비를 못하는 공격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는 것도 차 감독의 인터뷰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실점을 당하지 않아 야 이길 있다”도 차 감독이 많이 내뱉는 말이다. 이런 수비 강조는 아시 아 최고 공격수 출신이라는 차 감독의 선수 이력에 비춰보면 뜻밖이다. 물론 차 감독은 자신의 축구가 수비축구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거부감도 내보인다. “지난해 올림픽팀을 맡았던 비쇼베츠 감독처럼 수비수를 중용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공격수와 수비수를 일정한 비율로 골고루 기용한다 . 다만 공격수들의 수비가담, 수비수의 공격가담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게 차 감독의 항변이다. 그래서 수비축구가 아니라 실리축구다.

어떻든 차 감독이 이런 실리축구를 본격 구상하게 된 것은 지난해 6월 유 럽선수권 이후로 알려졌다. 당시 영국까지 날아가 대회를 지켜본 차 감독 에게 “당시 독일과 체코가 철저한 대인수비로 재미없는 축구를 한다고 비난받았지만, 결국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가졌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 다. 친선경기가 아니라 월드컵 진출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걸린 대회에서 강력한 대인 밀착수비를 구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거리슛의 강조도 실리축구의 내용. 차 감독은 “현대축구는 공 격수에 의한 득점보다 수비의 공격가담에 의한 득점이 많아지는 추세”라 며 중거리슛을 주요 득점방법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기형, 유상철, 홍명 보, 이민성 등 중거리 슈터가 주전으로 많이 뛰는 것도 이런 차 감독의 전술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 차 감독은 일본전에서 이민성의 벼락같은 중 거리슛으로 역전승을 일궈냈다.


청교도적 생활태도 큰 영향

(사진/차범근 축구는 `빠른 축구'를 지향한다. "누가 빨리 공간을 확보하느냐에 따라라 승패가 달렸다"고 그는 말한다. 10월4일 UAE전. )

차범근 축구가 경기장에서 템포와 실리를 두 기둥으로 삼는다면, 경기장 밖에서는 충분한 정보분석, 엄격한 규율과 원리원칙 강조가 차범근 축구 의 뿌리다.

차 감독이 오래 전부터 컴퓨터를 이용해 축구관련 정보를 수집하며 분석 해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차 감독은 틈나는 대로 노트북 컴퓨터 를 두들긴다. 이 노트북에는 선수들의 컨디션, 훈련내용뿐 아니라 각 팀 의 전력에 대한 분석으로 가득 차 있다. 또 세계축구 흐름과 관련된 내용 들도 노트북에 담긴다. 이 가운데 특히 상대팀 전력에 대한 철저한 분석 은 곧바로 팀전술에 응용된다.

사실 일본전과 아랍에미리트전의 승리는 철저한 상대팀 전력분석에서 비 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일본의 막강 미드필드를 무력화한 것이나 날카롭기 그지없던 아랍에미리트의 왼쪽 측면돌파가 번번이 무위에 그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리원칙과 규율을 중요시하는 것도 차범근 축구를 떠받치는 축이다. 이 것은 술,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않는 차 감독의 청교도적인 생활태도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대표팀 규율을 정해놓고 벌금제를 도입한 것이나, 경 기장 이동시에도 항상 복장을 통일할 것을 요구하는 것, 또 식사를 모두 함께 시작하고 끝내도록 하는 것들은 대표적인 사례다. 차 감독의 이런 태도는 차 감독이 89년 독일에서 귀국한 이후 한국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 들었던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대표팀을 한몸으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된다’고 선을 분명하게 밝히는 이런 차 감독의 깔끔한 태도는 보도진에게도 대부분 호감을 주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도 차범근 축구의 특징이다. 차 감독은 항상 국가대표로서의 사명감, 애국심, 품위 를 지킬 것을 선수들에게 요구한다. “국가대표선수는 그 나라의 축구를 대표하는 것이고, 따라서 경기력이나 정신자세도 그에 걸맞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차 감독이 유럽, 그 가운데서도 합리적 사고로 이름높은 독일 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한 것을 고려하면 이처럼 ‘봉건적’으로 비쳐지는 가치들을 강조하는 것이 의외로 느껴지기도 한다.

박병수 기자/ 한겨레 스포츠레저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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