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과학과 지성

유아는 소리로 기억한다

(사진/유아들은 단어의 의미를 깨닫기 1년 전부터 단어의 소리를 기억한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린 아기에게 속삭이거나 동화를 들려주는 일이 헛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유아들은 단어의 의미를 깨닫기 거의 일년 전부터 그 단어의 소리를 기억한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최근 한 실험을 통해 밝혀 졌기 때문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심리학자인 피터 주스칙 교수와 AT&T연구소 심리학자 인 엘리자벳 혼이 실험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어휘를 모르는 아기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말을 습득하게 되는지 실험한 결과를 최근 <사이언스> 에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보통 유아의 언어 능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생후 18개월 전후이 다. 그러나 이번 실험 결과는 아기들이 훨씬 이전부터 무의식적으로 언어 를 배우기 시작한다는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아기들은 외부에서 소리의 자극이 반복되는 가운데 우선 친숙한 소리 패 턴을 저장하고, 언어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생후 18개월 무렵 여기에 의미 를 부여함으로써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18개월 훨씬 이전에 언어 능력 터득

아기들은 생후 1년이 되기까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기술을 이 미 개발하게 된다. 생후 1년 된 아이는 음성이나 말하는 속도의 차이에도 그 소리를 구분해낼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된다. 또 외국어와 모국어도 구 분한다는 것이다.

두 심리학자는 생후 8개월 된 아기들의 집을 2주일 동안 10번 방문을 했 다. 이 때마다 이들은 어린이 동화를 녹음한 오디오 테이프를 30분 동안 틀어주고 함께 놀았다.

2주뒤 두 심리학자는 아기들을 실험실로 데려가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했 다. 이들은 이번에는 다른 동화를 들려주고, 아기들의 반응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두번째 동화에는 두가지 종류의 단어가 포함돼 있었다. 한가지는 코끼리( elephant) 최고(best) 밀림(jungle) 같은 단어로, 이들 단어는 전에 오디 오 테이프를 통해 들려준 동화에도 포함돼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살구(a pricot) 해변(beach) 낙타(camel)같은 단어는 발음은 비슷하지만 처음 들 려주는 단어였다.

아기들은 처음 듣는 단어보다 이미 오디오 테이프로 들어 익숙해진 단어 에 대해 15% 정도 더 길게 집중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이는 아기가 의미 는 모르지만 단어를 기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반면 오디오 테이프를 들 려주지 않았던 대조집단 아이들은 두가지 종류의 단어와 이야기에 대해 똑같은 관심을 보였다.

인디아나대 심리학자 데이비드 파이소니는 이번 연구를 ‘기념비적인 것 ’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많은 과학자들이 지금까지는 아기들이 먼저 개 념에서 출발해서, 그 개념을 묘사하는 단어를 알게 된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무의식 적인 기억력, 즉 아이들이 정밀한 소리의 패턴에 대해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파이소니 교수는 “비록 아기들은 자 신이 듣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의 신경시스템은 그 소리에 집중력 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번 실험에서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은 새들이 노래소리를 배우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두 심리학자는 찌르레기가 어떻게 소리를 배우는지 알아내기 위한 새장을 만들었다. 이 새장에는 부리로 누를 수 있는 버튼이 있다. 찌르레기가 부 리로 바른 노래가 나오는 버튼을 누르면 먹을 것을 주고, 틀린 노래를 선 택하면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이처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새들은 위협적인 포식자와 동료들의 소리 를 정확히 구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두 심리학자들은 어린이들 역시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인간 관계를 터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유아기의 소리 자극이 언어 발달에 중요하다는 이번 실험 결과는 만 3세 까지의 경험이 뇌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그동안의 신경과학자 들의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두뇌 발달은 출생 첫 해가 가장 중요”

미국 연방교육위원회 프랭크 뉴먼 회장은 “두뇌 발달에는 특히 출생 첫 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3세까지 버림받거나 학대당한 어린이 는 정상 상태를 회복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따라 미국에는 ‘한살부 터 세살까지’라는 단체가 생겨나 유아기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에 맹렬한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이의 뇌는 1천억개의 뉴런(신경세포)을 갖고 있다. 아이의 경험 즉 외부의 자극이 많을수록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는 늘어난다. 특히 출생 첫해 아이들의 뇌 중심부에서는 시냅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이 만들어진다. 이 시냅스 연결 은 2세 때 최고로 올라가 10세나 11세 될 때까지 이 수준을 그대로 유지 한다. 중요한 것은 시냅스가 많을수록 뇌는 유연성과 복원력이 높아진다 는 사실이다.

10세가 지나면 창조되는 시냅스보다 퇴화되는 시냅스가 늘어나 균형이 급 격히 깨지기 시작한다. 약한 시냅스 연결은 파괴되고 경험에 의해 강화된 시냅스만 살아남아 결국 이것이 마음 속에 독특한 감정 패턴이나 생각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자들은 출생 뒤 몇년 동안 아이와 환경 사이에 ‘창’이 열리게 되며, 이 시기에 창을 통해 적절한 자극이 주어져야 뇌의 구조가 안정화 된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언어를 습득하는 창은 다섯살이나 여섯살이 되면 닫혀버린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소한 초등학교에서부터 외국어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뇌 전문가들은 언어 능력을 높이려면 아기에게 높은 어조로 리듬감 있는 말을 해주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아기를 얼러 주는 할머니의 행동은 수천년을 내려온 본능적인 언어 학습과정인지도 모 른다.

신동호 기자/ 한겨레 생활과학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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