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지구촌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다”

(사진/노동환경이 악화되는 가운데 경제회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의류상점의 할인판매 포스터만 요란할 뿐 손님의 발길은 드물다.

10월7일로 홍콩·중국 1백일을 맞는 홍콩인들은 과연 무엇을 느끼고, 어 떻게 변했을까.

1백일이 지났다해도 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홍콩 주룽(九龍)반도 중 심지 침사추이의 밤거리에서 ‘변화된 홍콩’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이 다. 다만 사람들의 물결로 혼잡한 거리에 걸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48 주년 경축’이라는 간판과 극장가에서 상영되는 덩샤오핑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정도가 변화의 느낌을 줄 뿐이다. 지난 6월30일의 거창했던 반환행 사와 서방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에도 담담했던 홍콩인들은 1백일 역시 차 분히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분함은 홍콩의 지난 8월 말 외환 보유고가 8백53억달러로 일본, 중국, 대만에 이어 세계 4위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즉 ‘1국2체제’ 아 래서 홍콩에 급격한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들인 것이다.


노동법안 폐기에 우려의 목소리

하지만 ‘홍콩·중국’의 1백일은 분명 변화의 기간이었다. 지난 9월26일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내년부터 모든 학교에서 영어 대신 중국어(광둥어 )로 수업해야 한다고 발표하는 등 차근차근 ‘중국화’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20일 홍콩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 참석하려 했던 대만 대표 수유언둥(許遠東) 중앙은행 총재가 비자발급 거 부로 홍콩행이 좌절된 것은 이런 변화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다. 또 덩샤오핑 일대기를 피해 다른 극장에 들어가도 사람들은 영화 상 영 전에 흘러나오는 중국국가를 들어야만 한다.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홍콩의 재야인 사들과 외국인 노동자 등 이른바 현 체제의 ‘소외계층’이다. 홍콩의 대 표적인 노동단체인 홍콩노동조합총연합(CTU)의 총간사인 엘리자베스 탕(4 1·여)도 그중 하나다.

탕이 민주화에 눈뜬 것은 70년대말 대학 가톨릭학생회에 참여하면서부터 다. 당시의 홍콩의 학생운동가들은 영국식민주의에 대한 투쟁과 주거환경 및 노동법 개선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 역시 빈민촌이나 선 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홍콩의 민주화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20 년 가까이 ‘투쟁’해온 탕으로서는 현재 진행중인 ‘홍콩의 중국화’ 움 직임에 몹시 신경이 쓰인다. 그동안 쌓아온 ‘자그마한 권리’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사회민주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만 노동자의 권익을 지 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새로 제정될 노동법이 과연 이런 대의 에 부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현재 노동법 제정문제는 CTU를 비롯한 홍콩 노동계 전체의 관심이 집중돼 있는 현안이다. 반환 이전 영국의 마지막 총독이던 패튼 총독 시절에 제 정된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혁신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내용을 담았었다. 그러나 이 법률안은 반환과 동시에 임시입법회에 의해 폐기되 고 말았다. 임시입법회는 내년에 치러질 총선 때까지 ‘한시적으로’ 의 회 기능을 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중국 정부에 의해 ‘반중국 계’ 인사들이 배제된 채 구성됐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중국계로 지목 돼 반환과 함께 의원직을 잃은 민주당의 장병랑 부주석도 입법회의 ‘월 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기는 마찬가지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미래는 있는가

(사진/홍콩에서 `반중국계' 인사들은 갈수록 활동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홍콩노동조합총연합 총간사 엘리자베스탕은 노동자의 권익을 우려하고 있다. )

“임시입법회는 중국 정부가 지정한 인사들로 구성된 비민주적인 기관입 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법률을 폐기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자질이 의 심스런 사람들입니다.”

홍콩의 외국인 노동자들 역시 홍콩반환 이후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불안 해 하기는 마찬가지다. 네팔에서 온 일리아리치(35)는 그의 아버지가 영 국의 용병 출신이었던 탓에 영구영주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홍 콩에서 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얼마간 돈만 벌면 고향으로 돌아 갈 생각”이라고 말한다. 홍콩의 산업구조조정 이후 거의 모든 공장들이 중국으로 이전되면서 30만명의 홍콩 거주 외국인 노동자들은 중국 이민노 동자들 뿐아니라 홍콩인들과도 일자리 경쟁을 벌여야 할 정도로 노동환경 이 열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환 이후 불어닥친 ‘중국인 우월 주의 바람’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떨게 만들고 있다.

일반 시민 중에도 불안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룽반도 의 요마테역 근처 틴하우사원에서 만난 리(65) 할아버지도 그중 하나다. 중국내전 당시 상하이에서 탈출했던 리 할아버지는 지금 직업도 없고 부 양가족도 없다. 서울의 탑골공원과 비슷한 이곳 턴하우사원에는 많은 노 인들과 부랑인들이 배회하고 있다. 이들은 홍콩에서 최저생계에도 못미치 는 생활을 한다. 최근의 현지 조사에 의하면 홍콩인의 8분의 1 가량이 빈 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많은 이들이 퇴직자들이 다. 공공부문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노후보장제도가 미비한 홍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반환 이후 중국 정부가 그나마의 복지예산도 삭감하려 한다는 풍 문이 돌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시아이민노동자센타의 김미선씨 는 “지금까지 정부보조로 사회사업을 해오던 종교단체 등도 지원금이 줄 어들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런 ‘불안세력’들은 10월8일 반 환 1백일을 맞아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민주적 법률의 제정 등을 위해 입법회와 둥첸화 행정장관에게 압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콩·중국에 대해 이런 불만의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에 대한 비판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다. 이는 “인기영합주의·파벌주의 로 사회를 이간질하는 행동을 경계해야 한다”며 이들 ‘민주세력’을 비 판한 둥첸화 초대 행정장관의 인기상승에서 잘 드러난다. 둥 장관의 지지 율은 반환 당시 50% 정도에서 최근 85%까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


종교단체도 ‘막막’… 둥첸화 인기 상승

사실 상당수 홍콩인들은 정치권과 재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움직임들 을 ‘티 타임의 대화’에도 끼워주지 않는다. 이들은 '민주투사'라는 민 주당의 마틴 리 전 총재가 변호사비용으로 시간당 1천달러씩 버는 모습이 나, CTU가 서방세계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노동법 철폐 문제에 대해서도 이들은 “반환 전에야 겨우 전향적 노동법 을 만든 영국에 대한 비판이 앞서야지, 그것을 폐기한 중국만 비민주적이 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특히 ‘중국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홍콩의 노동계는 내년 선거에 보이콧이 아닌 참여전술 로 대응할 예정이다. 선거를 보이콧하는 것은 홍콩 주민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 민주당 역시 이들과 함께 30명으로 결 정된 직능의원직에 도전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들이 싸워야 할 ‘적’은 “아직 중국인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여론만이 아니다. 지난 95년 입법 국 선거에서 30% 안팎을 기록할 정도의 낮은 투표율 또한 이들이 넘어야 할 벽이다. 만약 내년에도 투표율이 이렇게 낮다면, 이들이 추구하는 ‘ 민주화’가 더이상 홍콩의 미래를 예측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은 홍콩이 다만 앞으로도 ‘중국에 황금알을 낳아주는 곳’ 이상의 의미 이상일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중국 1백 일을 맞는 이들의 고민은 더욱 커 보인다.

홍콩=글·사진 이상엽/ 다큐네트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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