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격동하는 재벌/신세계그룹

“대주주 얼굴을 볼 수 없네”



(사진/정재은 명예회장, 이명희 부회장, 정용진 상무, 유한섭 회장(왼쪽부터).)

신세계그룹의 고위 임원회의에는 세 가지가 있다. 모기업으로 그룹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백화점의 본부장회의가 매주 한번씩, 계열 사 사장들의 그룹 사장단회의가 월 1회씩 열린다. 이 밖에 상하반기 한차 례씩 열리는 그룹 경영전략회의가 있다. 그러나 이들 회의에 신세계의 대 주주인 이명희(54) 부회장이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부회장의 남편 인 정재은(58) 그룹 명예회장도 마찬가지다. 임원들조차 대주주들의 얼굴 을 볼 기회가 1년에 한두번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만큼 신세계의 경영은 철저한 전문경영인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수백억 원의 투자비가 들어가는 부동산 매입건과 같은 주요 사안도 임원회의에서 결정하고 대주주에게는 사후보고 정도로 그친다. 대부분의 다른 그룹에서 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룹의 한 임원은 “간혹 주요 사안을 결정 하기 전에 이 부회장에게 보고하면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할 정 도”라고 말한다. 대주주를 대신해 그룹을 총괄하는 역할은 전문경영인인 유한섭(60) 회장의 몫이다. 하지만 신세계의 결재서류에는 유 회장의 결 재란이 없다. 각 계열사 대표이사들이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다. 전문경영 인에게 권한을 최대한 부여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전통은 이 부회장의 부친이자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 시절 때 부터의 자율경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이기도 한 이 부회장은 17년간 상 무직에 있다가 올해 초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룹 임원들이 몇년 전 부터 직급을 올릴 것을 건의했지만 이 부회장은 그때마다 “그럴 필요없 다”는 말로 사양했다. 올해 초 승진도 이 부회장의 조카들이 한솔, 제일 제당, 새한그룹에서 전무나 부사장에 임명되자 집안의 모양새를 생각해 마지못해 응했다고 한다.

지난 9월 초 이 부회장의 외아들인 정용진(29)씨가 기획조정실 그룹총괄 상무로 승진하면서 신세계도 2세체제의 향배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러나 신세계는 “정 상무는 경영수업중”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또 경영 수업은 앞으로 몇년간 더 계속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정 상무는 취 임 뒤에도 전 계열사를 돌며 업무를 파악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직접적 인 경영결정은 일체 하지 않고 있다. 2세 총수들의 섣부른 경영으로 적지 않은 대기업들이 휘청거리고 있는 현실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은 것일 까.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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