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만리재에서

미국이 얕잡아볼 만도 하구나

지난 10월3일 통일 7주년을 맞는 독일의 표정은 ‘잔치가 끝난 뒤끝’처 럼 우울했던가 보다. 그곳 소식을 전하는 특파원들의 기사는 대개 “통일 , 아직도 머나먼 길” “동독은 8년 전 끝났지만 연방독일은 아직 태어나 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무너진 베를린장벽 대신 새로이 생겨나고 있다는 심리적 장벽의 내용들로 채워진다. 통일 뒤 어려워진 경제상황에 대한 서독주민 들의 분노, 상대적 빈곤과 삶의 불안정성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불만이 뒤 엉켜 일으키는 상승작용이 그것이다.

서독지역은 96년까지 해마다 국민총생산의 6.6%에 해당하는 세금을, 지금 까지 모두 1조1천7백80억 마르크를 동쪽에 투입했다. 그에 따라 동독지역 의 총생산은 91년 서독지역에 비해 31.3%이던 것이 96년 54.5%로 늘었고 노동자의 임금도 서독쪽의 84%로 늘었다. 그대신 서독지역은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률과 고율의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동독쪽도 마찬가지. 구체제에선 생각도 못할 20%에 이르는 엄청난 실업률 에 고달프다. 익숙지 않은 시장경제체제의 잔혹성은 또다른 불만이다. 대 개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설 땅이 없다는 느낌’에 빠져 있다. 게다가 2만여명의 행정관료 기업가 등이 밀려오면서 마치 나라잃은 민족같은 좌절감을 느낀다. 실제로 동독주민의 만족도는 통일 직후인 77% 에서 96년엔 44%로 떨어졌다. 반대로 60%는 ‘독일인이 아닌 동독인’으 로 느낀다는 게 현지의 조사결과다.

그즈음 미국 는 카메라에 잡힌 북한의 기근 실상을 방영했다(이 필 름은 10월5일 문화방송이 받아 국내에 전했다). “생후 2개월만에 버려진 이 아이는 이제 살 수 없습니다. 아이는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 아이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퀭한 눈을 가끔 깜박일 뿐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리포터는 이렇게 부연했다. “이 고아원의 아이들 은 울지 않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먹을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 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도 죽은 듯 누워있다.

반전된 화면은 한 병원의 텅빈 약장, 병원 앞에 늘어선 아기 업은 여인들 , 도로변에서 풀씨를 채취하는 여인들의 모습, 걷다가 금세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여인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철로변에 버려진 한 무 더기 주검에서 멈춘다.

이어 아나운서와 유엔대사 리처드슨의 대담. “그들을 도울 길이 없는가. ” “분명 재앙상태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구호품을 보 낸다면 구할 수 있다.” “어떤 방법이 있는가.” “적십자 등 민간단체 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독일의 현실이라는 잿빛 밑그림에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본다. 그러나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애당초 짝이 될 수 없는 퍼즐조각인지도 모른다. 세계 정상의 경제력, 일체감 형성을 위해 기울인 꾸준한 노력, 정부의 열린 태도 등 독일의 여건을 우리는 어느 것 하나 갖추고 있지 않 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최소한의 인도적 배려도 외면한다. 매사가 오로 지 북한의 돌연한 붕괴에 집중된다.

아나운서와 리처드슨 대사는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죽어가는 아 이들을 입양할 수는 없는가.” “외교관계가 없어 불가능하다.” 부끄러 웠다. 자동차협상에서 미국의 오만을 규탄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그 러나 미국은 한국을 얕잡아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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