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역사속의 여성

사임당의 성공, 난설헌의 좌절

아름답고 똑똑한, 그러나 부드럽고 다소곳해서 결코 남편을 주눅들게 하 지 않는 아내는 아마도 남자들이 꿈꾸는 이상형의 여인일 게다. 그런 이 상형의 여인을 역사 속의 인물 가운데서 고르라면 십중팔구 맨 먼저 신사 임당을 떠올릴 게 틀림없다. 신사임당은 조선의 대표적 학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요, 자신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서 함부로 남편을 무시 하지 않고 남편을 바른 길로 이끄는 데 진력한 현명한 내조자요, 착한 며 느리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스스로의 재능을 살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여류문인 가운데 하나로 꼽 힌다. 그런 신사임당을 보노라면 집안 일, 애 키우기만으로 지쳐버리고 거기다 직장생활 혹은 자아개발을 위한 시간투자라도 할라치면 숨가쁘기 만 한 오늘의 아내들은 정말 주눅이 든다. 신사임당은 슈퍼우먼이었단 말 인가.

그런데 신사임당의 삶을 눈여겨 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사 임당은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무남독녀였던 그의 어머니가 결혼 뒤에도 계속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충실한 교육을 받 았던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 맞는 가르침을 베 풀었다. 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했는데, 무남독녀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친정에서 살았다. 물론 몇차례 시가에 다녀오긴 했 지만. 그러면서 세 딸과 네 아들을 낳아 키웠다. 사임당이 강릉을 아주 떠나 시가로 생활을 옮긴 것은 결혼한 지 20년 된 38세때였다. 10년 뒤 사임당은 세상을 떠났고, 셋째 아들 율곡이 외가의 제사를 모셨다.

결혼과 동시에 ‘출가외인’이 되어 오로지 시가를 위해 헌신했을 법한 사임당의 삶의 중심이 뜻밖에 시가가 아니라 강릉 친정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뜻밖의 사실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결혼풍습과 그를 둘러싼 사회 상황을 알아야 한다. ‘출가외인’이란 한국 여성의 삶 을 단적으로 규정해온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출가외인’은 단군 이 래 수천년에 걸친 전통이 안겨준 숙명이 아니다. 조선후기 그러니까 임진 왜란 후인 17세기 무렵,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 윤리가 일반에게까지 널 리 퍼지면서 정착된 것이다.

그럼 그 전엔 어떠했을까? 결혼하면 남편이 아내 집에 가 살면서 자식 낳 아 웬만큼 키운 다음 남편 집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결혼풍습이었다. 이러한 결혼풍습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지켜졌다 . 16세기 초에 살았던 신사임당은 고래의 결혼풍습에 충실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출가외인 또는 시집살이란 말이 설 자리가 없었고, 가족 내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재산상속도 아들딸 차별 없이 고루 나눠줬고 제사 또한 아들이 없으면 당연히 딸과 사위가 모셨다 . 친손자와 외손자를 차별하지 않았으며, 외손자가 제사 모시는 일이 흔 했다. 율곡이 그 좋은 예다.

신사임당이 슈퍼우먼이 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능력이 출중해서만이 아 니다. 사임당보다 약 60년 뒤에 태어난 허난설헌이 사임당 못지않은 출중 한 여성이었으면서도 좌절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인지 모른다. 난설헌을 둘러싼 삶의 환경이 사임당 시절의 그것과 많이 달라진 때문 말이다. 사 임당과 난설헌의 성공과 좌절은 조선 여성의 삶, 그 변화의 축도가 아닐 까 한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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