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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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빨간 선홍색의 머루주는 포도주 빛갈보다 한결 더 선명하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큰 산의 가을걷이도 절정을 이룬 것 같다. 설악산 대 청봉이 올려다 보이는 남설악 자락은 이미 무서리가 내리고 있다. 머루와 다래는 단풍이 들기가 바쁘게 술렁술렁 잎이 지며 까맣게 농익은 머루송 이들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몇차례 서리를 맞아 꺼뭇꺼뭇 점박이가 된 다래도 저절로 툭툭 떨어져 내려 넝쿨만 흔들어주면 즉석에서 단맛을 즐 길 수 있다. 산에 기대어 사는 농가들은 송이와 느타리버섯을 따랴, 머루 주와 다래주를 담그랴 바쁘지만 즐거운 한때다.
분이 뽀얗게 돋은 머루는 살짝만 건드려도 피처럼 빨간 즙이 배어나고 달 콤한 향기가 사방으로 번져 근처의 벌들이 일시에 모여든다. 한 알 따서 입에 넣으면 마치 포도를 머루알 크기로 농축해놓은 듯 톡 쏘는 강한 맛 이 난다. 달고 시고 독특한 향은 한국 머루가 아니고서는 흉내낼 수 없다 .
이렇게 농익은 것이라야 머루주를 담가도 맛과 향이 제대로 난다. 그래서 머루주를 담글 때는 날을 잡아놓고 머루를 딴다. 따는 시기는 10월 초부 터 중순까지 이어지는데, 한 달뱅이씩 따가지고 내려오면 한 알씩 머루알 만을 따내 항아리에 담는다. 머루알을 항아리에 절반쯤 채우고 나면 계피 와 감초, 설탕을 약간 얹어 뚜껑을 덮은 채 1주일에서 열흘쯤 그대로 재 어놓는다. 머루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빨간 즙이 흥건하게 배어나온다 .
이때 술을 붓는데 대개는 소주를 이용한다. 그러나 소주 대신 적포도주를 독의 어깨 부분까지 채워 밀봉한 다음 선선한 곳에서 숙성시키면 그 빛깔 이 더욱 선명하고 맛도 더 깔끔하다. 겨울을 지나 3∼4월부터 먹는데 5∼ 7도 정도의 순한 술이 된다. 포도와 머루는 같은 성분이어서 서로 보완을 해 색과 맛이 더 살아나는 모양이다. 완성된 술은 이듬해까지 두고 먹어 도 맛과 빛깔이 변하지 않는다.
남설악 오색약수 단지에 있는 그린야드호텔의 토속식당(0396-672-5621)이 이렇게 머루주를 담근다. 해마다 5백만∼6백만원어치의 머루를 사들여 술 을 담가놓고 식사 손님들에게 소주잔으로 한잔씩 서비스로 내는데 인기가 대단하다. 손님들이 원하면 1.5리터 한 병에 2만원을 받고 팔기도 하고 전화로 주문하면 택배도 해준다. 고속버스가 닿는 서울의 경우 당일로 배 달이 된다고 한다.
머루주는 포도주와 같은 발효주여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포도주처럼 먹으 면 된다. 머루주는 맛도 맛이지만 약으로도 효험이 있다. 산골에서는 아 이들이 겨울철 독감이나 홍역에 걸려 심한 열로 갈증을 느낄 때 땅에 묻 어둔 시원한 머루주를 한 잔 먹여 열을 내쫓고 갈증을 풀어주었다. 지금 도 머루주는 혈액순환을 돕고 보혈강장제로 신경계통에 효험이 있는 약술 로 전해온다.
남설악권의 점봉산과 가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경계로 내륙쪽은 머루 가 귀한 반면 다래가 많이 열린다. 추석이 지나면서 담기 시작하는 다래 주는 지금도 술 담그기가 계속되고 있다. 머루보다 살이 많고 당도가 높 아 일반 과일주처럼 잘 익은 것으로 담근 지 2∼3주면 먹을 수 있어 벌써 부터 항아리를 열어놓은 곳도 있다.
투명하도록 말랑말랑해진 다래는 꼭 누르면 녹즙같은 속이 까뭇까뭇한 씨 와 함께 밀려나온다. 육질이 키위와 흡사하고 맛도 잘 익은 키위를 농축 시킨 것 같다. 술은 아직 발효가 진행중이어서인지 달콤하면서 혀끝이 짜 릿해 과일주스를 칵테일한 듯 친근하게 감친다. 필례계곡의 점봉산쉼터(0 365-461-1858)에 문의하면 다래주를 택배로 받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다 래주 외에도 돌배술, 마가목열매술, 삼지구엽술 등을 넉넉히 담가놓고 있 다.
가족 모임이나 성찬에 산머루와 다래주 그리고 돌배술을 마련해놓고, 빛 깔 좋은 머루주로 축배하고 향기 그윽한 돌배술로 건배하면 다른 어떤 술 이 그 격을 따를 수 있을까. 이 역시 삶의 멋이 아닐까 싶다.
남설악 단풍놀이 요즘이 좋아
남설악 단풍은 지금부터 다음 주말까지가 가장 아름답다. 단풍이 아름다 운 길을 골라가면 좋다. 홍천과 인제를 거쳐 한계령에 이르고 정상에서 8 .0km 내려가 있는 오색약수에 들러 머루주를 맛본다. 다시 13.5km를 더 내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홍천 방향으로 들어서 구룡령을 넘고, 창촌 과 서석을 거쳐 홍천으로 나서면 된다. 한계령 정상에서 200m쯤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필례계곡이 열려 있고, 5∼6분 거리에 점봉산쉼터가 있다.
한계령 일대 단풍이 일품이고 구룡령 정상 양쪽의 단풍도 절경이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낙산과 외설악을 들러볼 수도 있지만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붐벼 별로 득이 못된다. 구룡령을 넘어 4.5km 지점인 광원마을 올콩이네 민박(0366-32-5728)에서도 오대산과 게방산 만삼을 캐다가 만삼닭을 내고 있어 들러볼 만하다. 오색 토속식당과 점봉산쉼터, 올콩이네 민박에서는 숙박 문의도 받는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