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삶

제주도 농심이 찢겨진다

(사진/농민들은 염분피해로 농사를 망쳐 망연자실하고 있다. 염분이 파고들어 성장을 멈춘 고구마.)

절반은 가뭄, 절반은 태풍. 제주도 서부지역은 가뭄, 동부지역은 태풍에 의한 염분피해라는 해괴한 이상기후가 제주도 농가를 괴롭히고 있다. 농 민들은 “참으로 요상하다”며 고개를 모로 내젓는다. 별의별 흉흉한 소 문까지 떠돈다. “나랏님이 변변치 못해서…”라며 말끝을 흐리는 농민들 도 있고, “마라도에 큰 절이 세워져 제주도 토신이 노했다”는 미신에 가까운 소문까지 소리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수확을 기대하며 들떠 있을 농민들이 하늘만 쳐다보는 게 하루 일과처럼 돼버렸다.


물맛도 못본 콩대에 한숨만 나온다

제주도 서부지역인 안덕면·대정읍·한림읍·애월읍·한경면에서는 지난 8월 초 장마가 지나간 뒤로 비다운 비를 구경한 적이 없다. 밭은 물기 한 점 찾아보기가 힘들어 사막이나 다름없다. 밭을 밟으면 흙먼지가 날린다. 바닥은 미숫가루처럼 푸석푸석하기만 하다.

서부지역 중산간 지대인 안덕면 서광리에서 콩 3천평을 재배하는 고길성( 43)씨는 타들어가는 콩밭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담배만 피워댄다. 이제 콩 농사는 폐작이나 다름없다. 물맛을 보지 못한 콩대가 바늘처럼 가늘어져, 말라비틀어진 콩깍지조차 지탱하기 버거워 보인다. 콩잎을 만지면 불에 타고 남은 재처럼 바스락거리며 부서진다. 콩깍지에 들어 있는 콩은 꼭 고추씨만하다. 20여일만 지나면 수확해야 할 콩이 고추씨처럼 납작하고 노랗게 익어버려 작고 딴딴하기만 한 것이다. 정상적인 작황이 이뤄졌다 면 당장이라도 밥 위에 앉혀 먹을 수 있을 만큼 물기를 머금고 싱싱한 연 파란색을 띠어야 한다. 그런 생각만 하면 고씨의 속이 탄다. “콩값은 다 른 농작물과 달리 가격이 안정돼 있어 제주 농가들이 즐겨 심었지요. 그 런데 이제 애물단지가 됐어요. 갈아 엎어버리자니 아깝고, 그냥 내버려 두기도 그렇고….”

고씨가 살고 있는 상동마을은 안덕면 서광리 가운데도 고지대에 해당한다 . 고지대인 만큼 수압이 약해 마실 물마저 동이 나버렸다. 마을 단위로 지하수를 퍼올려 물탱크에 저장해 마시는 식수가 지난 9월21일부터 나오 지 않기 시작했다. 지하수마저 말라 버린 것이다. 그나마 아쉬운 대로 아 기오줌처럼 졸졸 흐르던 물이 끊겨 버리자, 주민들은 경운기를 몰고 인근 대정읍까지 나가 식수를 구해와야 했다. 지난 9월25일 10mm 안팎의 비가 내렸지만 해갈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10월1일부터 다시 식수가 동이 났다 . 이웃간에 물싸움이 날 만큼 인정도 각박해졌다고 고씨는 한숨을 짓는다 .

다른 읍·면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림읍 상면리에 거주하는 양운식(32)씨 의 조밭도 거의 폐작이 돼버렸다. 돌담 밑에 있는 10분의 1 남짓한 조만 정상적으로 생장하고 있다. 그나마 응달이 져서 수분증발이 덜한 탓이다. 돌담 밑 조와 가뭄에 시달린 조를 비교해보니, 크기가 바나나와 고추만큼 이나 차이난다. 조이삭은 제대로 여물지 않고 껍데기만 남았다. 입으로 불면 훅 날아가 버린다. “작년에는 한 10마대 정도의 조가 나왔는데 올 해는 1∼2마대나 나올지 모르겠어요. 그나마 상품성이 떨어져 팔기는 어 려울 것 같아요.” 감자밭도 발아율이 20% 남짓이다. 옆집에서 빌려온 스 프링클러로 물을 주고 있긴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내다 팔기가 힘들다. “보관했다가 내년에 씨감자로라도 사용할 요량으로 물을 주고 있어요. 이렇게 나와서 일이라도 해야지, 집안에 앉아 있으면 속만 더 타지요.” 양씨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힘없이 발로 비벼 끈다.


평년 강우량의 8분의 1 수준에 그쳐

(사진/가뭄에 강한 것으로 알려진 감귤나무도 이번 가뭄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감귤이 물렁물렁하고 크기도 규격에 이르지 못했다. )

농민들은 “이런 가뭄을 겪어보기는 생전 처음”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여든 넘은 노인들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제주기상대의 자료에 따르면 올 8월 제주도 서부지역의 강수량은 161.8mm로 평년의 165.1mm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일일 강수량을 비교하면 가뭄의 실체가 드러난다. 평년에는 8월 강수량이 초순부터 하순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지만 올해는 8월10일께 한차례 장마가 지나가고는 비소식이 없다. 게다가 올 9월 강수량은 12.6m m로 평년 103.2mm의 8분의 1에도 못미친다. 거의 두달 동안 가뭄상태가 계속된 것이다.

애당초 콩이나 감자는 하늘에 맡긴 농사다. 하지만 감귤은 다르다. 감귤 농사는 밭작물보다 수익성이 좋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대부분 밭농사와 소규모 감귤재배를 같이 하는 서부지역 농민들에게 감귤농사는 그나마 목 돈을 집어들 수 있는 유일한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뭄에 강하다 는 감귤나무조차도 이번 가뭄에는 맥을 못쓰고 있다. 장기화된 가뭄으로 감귤나무에도 이상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안덕면에서 감귤 2천평과 콩 5천평을 재배하는 오성희(35)씨는 요즘 감귤 나무를 쳐다보면 괜시리 울화가 치민다. 콩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렇 게 정성을 들였던 감귤나무가 갈수록 축 처져가는 것이다. 지난 한달 동 안 밤잠을 설치며 수도꼭지에 매달려 있었던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해 보 이기만 한다. “수도세만 아까워요.” 오씨는 짧게 한마디만 하고는 입을 꾹 닫는다.

오씨의 감귤밭은 지반이 암반이라 피해가 더했다. 겉으로만 봐도 감귤나 무가 시들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잎이 노랗게 타들어가면서 안 쪽으로 동그랗게 말리고 있는 것이다. 크기도 5∼7cm 정도는 돼야 상품판 정을 받는데 아직도 3∼4cm 정도밖에 안 된다. “8∼9월 감귤이 한창 자 랄 때 비를 받지 못해서 그래요. 이제 더이상 크기는 힘들어요.” 게다가 감귤나무들이 감귤의 수분까지 빼앗아 생명을 지탱하는 바람에 탱글탱글 해야 할 감귤이 누르면 물렁물렁하다. 바람빠진 풍선모양이다. 이 정도면 감귤의 50% 이상이 상품판정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다른 소규모 감귤농 가들도 평년보다 20∼30% 정도는 상품수확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더 큰 걱정은 내년이다. 감귤은 아열대 식물이기 때문에 잎이 부족 하면 추위를 많이 탄다. 지금처럼 가뭄으로 낙엽이 계속 지면 감귤나무들 이 한기를 견디지 못해 내년 결실도 부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렁물렁한 감귤… 행정관청은 뒷북만

(사진/서부의 가뭄과 동부의 염분피해. 허약한 콩대가 콩깍지도 견디지 못한다. )

턱없이 부족한 관정시설로 물전쟁을 치러야 했던 농민들은 행정당국에 원 망의 화살을 돌린다. 행정당국은 9월 말이 돼서야 가뭄피해다 뭐다 하면 서 피해조사를 하고 다녔단다. 관정 같은 기반시설이 거의 없었던 것도 농민들의 불만이다. 소방서에서 물탱크가 동원된 것도 9월 말께다. “농 작물이 다 말라죽은 다음에 생색을 내면 뭐해요. 조사한다고 피해보상이 나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농민들 애만 타지요.”

서부지역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반면, 동부지역은 한가위 연휴를 덮친 태풍 ‘올리와’에 의한 염분피해로 농작물이 말라죽고 있다. 기상청 자 료로도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은 8, 9월 강수량이 2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도가 집계한 동부지역 염분피해만도 북제주군 구 좌·우도 지역과 남제주군 성산·표선 지역 밭작물 재배면적의 32.8%에 해당하는 4천5백90ha에 이른다. 해안선 6∼7km까지, 즉 제주도 중산간 지 방까지 염분피해를 입기는 지난 59년 사라호 태풍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더욱이 구좌·성산지역은 지난 8월3일 있었던 집중호우로 한차례 피해를 입은 데다 복구작업을 마칠 때쯤 다시 염분피해를 입어 망연자실하고 있 다. 농민들의 억장이 무너질 만하다.

성산읍 신양리 홍창윤(45)씨는 2번이나 재파종을 해야 했다. 지난 8월 집 중호우로 당근밭 2천5백여평이 씻겨 내려갔다. 감자로 재파종을 했다. 다 행히 감자는 작황이 좋았다. 이랑과 고랑이 다 메워질 정도로 그렇게 풍 작이었단다. 그러나 들뜬 기대도 잠시, 올리와 태풍이 몰고온 염분이 감 자잎을 황갈색으로 바꿔버렸다. 먹기 좋게 굵어야 할 감자가 손톱만하게 자란 상태에서 성장을 멈추자, 할 수 없이 무로 재파종을 했다. “종잣값 도 안 나오게 생겼어요. 고랑 뭘하수광(얘기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올리와 태풍이 비를 몰고 오지 않아 피해가 더했다. 비를 동반하면 잎에 묻은 염분을 씻어주지만, 이번 태풍은 이상하게 바람만 몰고왔다. 게다가 바닷가 돌이 도로 위에 올라올 정도로 강풍이어서 중산간 지대까지 염분 피해가 확산된 것이다. 또 한가위 사리를 맞아 바닷물이 만조상태에서 찾 아온 태풍은 염분을 잔뜩 품고 있었다. “일본쪽으로 태풍이 비켜간다고 하니까 행정당국이나 농민들이나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지요. 이렇게 염분이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집중호우에다 염분피해까지…. 올해 는 참 이상한 해입니다.”

지난 8월 집중호우로 구좌읍 평대리도 농가 470호 대부분의 밭이 유실됐 다. 평대리 이장 김석희(51)씨도 당근밭 1만2천여평 가운데 8천여평이 물 에 잠겼다. 8월3일 오후 3시20분께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바뀌더니 장 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평대리로 통하는 모든 길목은 순식간에 물이 차고 얕은 지대의 집들도 1m가 넘게 잠겨버렸다. 단 2시간 반에 317mm의 비가 쏟아졌다. 장대비가 멈춘 뒤 가본 김씨의 밭은 수영장이었단다. 돌 담은 무너지고 밭경계는 사라졌다. 밭에는 농작물 대신 흙과 돌멩이로 채 워졌다. 평대리 전체가 복구작업하는데만 거의 50일이 넘게 걸렸다. 밭에 깔린 돌을 치우고 돌담을 일으켜 세우며 재파종을 하는 등 막바지 복구작 업이 한창일 때쯤 다시 태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시든 농작물처럼 앓고 있는 농민들

염분을 잔뜩 먹은 당근잎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갔다. 지금도 우뭇가사리 처럼 검게 타죽은 당근잎이 밭바닥에 널려 있다. 오밀조밀하게 당근잎이 돋아난 곳은 20∼30%도 안 된다. 방풍림 아래에 있는 밭에서만 당근들이 제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밭은 20∼30cm 간격으로 하나씩, 마 치 쥐가 파먹은 것처럼 듬성듬성 당근잎이 솟아나 있다. 그래도 위안이라 면 당근잎이 조금씩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알이 제대로 들어설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행정당국의 조사도 끝났으니 보조금이라 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상당수 농가들이 돈에 찌들어 있거든요. 저 기 시들어 버린 농작물처럼 농민들도 시름시름 앓고 있어요.”

농업은 관광과 함께 제주도의 주요 수입원이다. 지난해 도의 발표대로 라 면 농업과 부대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제주도의 수입은 1조3천억원으로, 관 광수입 1조원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게다가 관광수입의 상당수는 외지인의 손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농업과 부대사업은 사실상 제주도 경제 의 가장 큰 기둥인 셈이다. 그래서 제주도를 덮친 이상기후는 농민들의 가슴을 더욱 후벼파고 있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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