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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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축구는 민족의 사기와 자신감을 드높이는 경기로 자리 잡았다. 일본을 5대1로 이긴 54년 스위스월드컵 극동예선.)
1863년 FA(영국축구협회)가 마련한 통일룰로 근대 스포츠의 모습을 갖춘 축구는 그 뒤 영국의 군인, 선원, 상인 등에 의해 영국과 교류가 활발했 던 세계 각국의 무역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의 경우도 서울의 관문인 제물포(인천),평양과 가까운 남포 등 역시 항구에 가장 먼저 축구가 전해졌다.
<한국축구 100년사>(대한축구협회 편저)라는 책에 따르면 한국에 축구가 들어오게 된 경위는 이렇다. 1882년 6월 제물포에 입항한 영국 군함 플라 잉 피시호의 수병들이 심심풀이로 부두에 내려와 볼을 차고 놀았단다. 그 러나 이들은 상륙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졸들에게 쫓겨 볼을 부두 에 그대로 둔 채 황급히 군함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국 수병들이 볼차는 모습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한국의 어린이 들이 그 볼을 주어 발로 찬 것이 우리나라 근대 축구의 기원이란다.
민족지도자들도 체육계에서 맹활약
우리의 민족성에 알맞은 스포츠였던지 축구는 학교나 사회단체가 단체별 혹은 연합으로 치르는 운동회나 경기대회를 통해 급속히 그리고 널리 한 반도에 보급되어갔다.
1910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겨 식민지가 되고만 한반도에서는 스포츠가 지니고 있는 민족정신 앙양의 기능이 통치자와 피지배자 양쪽으로부터 주 목을 받게 된다.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튼튼히 만들어 광복의 발판으로 삼자”는 숨 은 취지 아래 1920년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가 창립됐을 때 발기 인 90여명 가운데 순수한 경기인 출신은 10여명에 지나지 않았고 장덕수, 김성수(뒷날의 부통령), 백남준(뒷날의 참의원 의장), 최두선(뒷날의 국 무총리)등 민족지도자급 인사가 즐비했던 것만 보아도 이 조직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럭비인 출신으로 대한체육회장까지 지낸 김종열은 일제 아래에서 한국인 들이 일본인들과 치른 경기에서 어떤 정신적 자세로 맞섰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우리 학생팀이 객관적인 실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일본 학생팀과 대결했을 때의 일이다. 경기를 앞두고 코치인 전유량 선생님이 우리를 운 동장 한구석에 불러 모아놓고 작전지시를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즈막 한 목소리로 ‘너희들은 지금부터 스포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절대적으로 불 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일본팀에 이기고 말았다.”
일본 츠쿠바대학 사회학과의 마츠오카 히로시 교수는 일제시대의 한국 축 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반도에서는 축구가 독립을 바라는 욕 구의 분출구 가운데 하나로 붐을 이루었다. 축구볼을 일본사람으로 생각 하고 힘껏 차라는 분위기까지 빚어졌다. 1928년 서울 학생선발이 일본대 표를 5-0으로 압도했을 때 조선 전체가 문자 그대로 열광했다. 그 뒤 일 본은 조선팀과의 대결을 피하게 됐다.”
<서울신문>의 체육부장을 지낸 축구계의 원로 이유형은 “일제의 압제 아 래 신음하고 있던 우리 민족은 일본과의 축구경기를 전쟁으로 여기고 있 었다”라고 말했다.
지배자인 일제도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가 피지배자인 한민족의 사기를 드 높이고 자신감을 강화시키게 될까봐 무척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1914년 배재학당에 흰색의 축구골대가 세워지자 일본 경찰들이 밀어닥쳐 “백의민족의 민족사상을 의도적으로 고무하기 위해 세운 흰 골대를 철거 하라”고 강요해 결국 흰 골대를 검게 칠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사실 배재 학당의 아펜설러 교장은 윤치호, 이상재 등 민족지도자들과 협의 끝에 백 의민족의 자주정신과 투지를 키운다는 뜻으로 흰 색의 축구골대를 세웠다 . 골대의 색깔마저 일본 경찰의 눈에는 거슬렸던 것이다.
평양의 숭실중학, 서울의 보성중학, 연희전문(연세대의 전신), 조선축구 단, 경성(서울)축구단, 평양축구단, 함흥축구단 등 한국 축구팀은 여러차 례 일본팀을 이겨 민족의 사기를 앙양시켰다.
일본, 골대 철거 요구… 피압박민 설움도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 1935년 6월의 전일본종합축구선 수권대회 겸 올림픽 파견 선발전 그리고 그해 10월의 메이지신궁대회에서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그러나 일본축구협회는 당연히 우승팀인 경성축 구단을 중심으로 올림픽 대표선수를 뽑아야 함에도 김용식과 김영근 두 사람만을 선발했다. 이에 격분한 조선축구협회의 여운형 회장은 일본축구 협회에 “편파적인 민족차별을 시정하라”고 강력히 항의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1936년 1월에는 연희전문축구팀이 상하이 원정에 나서 4차례의 경기를 치 르고 3승1무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때 상하이해임시정부가 베푼 환영 만찬회에 참석한 연희전문 선수들은 김구 주석이 함께한 그 자리에서 난 생 처음 태극기를 보고 민족정신이 고양됨을 느끼게 된다.
축구가 독립운동을 부추긴 일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시절의 인도에서 도 있었다. 1911년 FAC(인도축구협회) 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인도인팀인 모픈배건이 영국인의 요크샤연대를 2-1로 격파한 쾌거는 인도인의 민족의 식을 크게 자극했다.
모픈배건은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인 녹색과 밝은 밤색(현재 인도국기에도 이 두가지 색이 들어 있다)을 팀컬러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구기종목 가운데도 특히 축구는 짙은 민족감정을 배경삼아 치르는 스포츠인가 보다.
고두현/ 스포츠 평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