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대선자금, 나침반이 없다

(사진/92년 대선 당시 민자당 김여삼 후보 진영의 03시계. 올 대선 정치자금 규모는 92년 당시 1조원 이상보다 크게 줄 전망이다.)

“한편으로는 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조하다.” 14대 대통령선거가 불과 80여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재벌그룹 회장들의 속마음을 재계의 한 관계자가 표현한 말이다. 전처럼 대선자금을 내놓으라는 정치권의 노 골적인 압력이 사라져 좋지만, 다른 기업이 기회는 이때다 싶어 경쟁사 몰래 뒷돈을 갖다 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불안하다는 뜻이다.


신한국당에도 깊은 돈가뭄

대기업 임원들은 이번 대선에서는 아직까지 과거처럼 돈들이 움직이지 않 고 있다고 말한다. 여당인 신한국당이 돈 가뭄으로 고전하고 있다는 이야 기는 이런 말을 뒷받침해 준다. 한 그룹의 임원은 “여당이 정치자금이 안 들어와 애를 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 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의 임원은 “선거는 돈이고, 특히 여당의 공조직 은 ‘히로뽕 조직’이어서 투약(자금지급)을 안하면 움직이지 않는데 요 즘 들리는 말로는 신한국당이 경상비조차 마련못해 쩔쩔맨다고 한다”고 말했다.

대선을 앞두고 집권 여당이 돈 가뭄을 겪는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 기업들이 여권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의심을 하지 않던 과거에는 대선 1년 전부터 새로운 실력자와 줄대기에 시동이 걸리고, 지금쯤은 이미 뭉 칫돈 1차분 제공이 끝난 시점이라는 것이 기업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13 대 대선에서 대부분의 재벌그룹들이 개별적으로 김영삼 당시 여당후보를 지원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 자신이 직접 실탄(돈)을 모은 사실이 비자금 사건에서 드러났고, 그 자금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당시 김영삼 후보 진영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 정설로 되 어 있다. 상당수 기업들은 선거전 막판에는 자금 이외에도 인력이나 정보 력 등 현물지원까지 마다하지 않는 충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전혀 딴판이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이 3위로 처진 반면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지지율이 1위를 고수하는 사 상 초유의 대선후보 지지율 여고야저(與低野高) 현상으로 재벌그룹들의 움직임이나 대응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노골적인 특정후보 지 원을 삼간 채 눈치보기만 열심이다. 모 그룹 회장비서실의 임원은 “기업 들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여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움직일 이유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한 예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지난 93년부터 지난 해까지 4년 동안 총 90억원의 지정기탁금을 여당에 제공했던 모 그룹은 올해의 경우 한푼의 기탁금도 내지 않고 있다.

재벌그룹들의 속내는 지난 9월30일 정부가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재벌그룹 총수 7명 등 기업인 23명에 대해 특별 사면 조처를 취했을 때도 잘 드러났다. 정치권에서는 특별사면의 배경으 로 △경제살리기 △새로 선출된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에 대한 축하선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면을 위한 수순밟기 △재벌에 대한 구애작전 등 다양한 해석이 대두했지만, 기업들은 마지막 구애작전설에 대해서는 “정부 의도야 알 수 없지만 현 상황에서 이 정도의 구애에 넘 어갈 기업이 있을까”라는 냉소적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국민회의 “떳떳한 돈만 받겠다”

특정그룹이 어느 후보에게 줄을 댔더라는 식의 소문이 거의 없는 것도 과 거와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모 재벌그룹이 여당 후보를 밀고 있다는 소 문이 유일할 정도다. 지난 92년 대선 때는 선거일을 훨씬 앞둔 시점부터 김영삼 후보에 줄을 댄 그룹들을 빗대 ‘2H2L’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 될 정도였다. 일부 그룹들은 김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공연히 비추 는 등 낯간지러운 충성경쟁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재계의 달라진 모습에 는 최근의 경제난도 큰몫을 하고 있다. 기업들은 경기침체로 주고 싶어도 줄 돈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전경련 부설 자유기업센터의 공병호 소장은 “기업들이 매번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적은 없었던 것같 다”고 말한다. 또 김영삼 정부 내내 재벌 총수들이 비자금 사건으로 곤 욕을 치르면서 대선자금을 냈다가 자칫 다음 정권에서 언제 처벌받을지 모른다는 ‘부메랑 공포증’도 적지 않다. 전경련 등 경제5단체들이 지난 6월 초 사상 처음으로 정치권에 대한 비자금 조성 중단을 공식선언하고 정치권에 고비용정치구조 개선을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권 력의 생리와 한국적 기업풍토를 누구보다 잘아는 재벌그룹들이 대선을 앞 두고 팔짱을 끼는 듯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대선후 보 지지율의 여저야고 현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대선 비자금이 전보다 덜 들어간다는 것이지 하나도 안 들어간다 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기업 관계자들의 말이다.

올들어 기업들이 신한국당에 지정기탁한 금액이 지난달 19일까지 모두 89 건, 3백61억원에 달하고 있다. 특히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 작한 뒤인 8월에도 7월보다 7억원이나 많은 57억원이 기탁됐다. 추석연휴 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지난달 12일에는 모 그룹이 8개 계열사로 나누 어 총 30억원을 신한국당에 지정기탁했다. 재계에는 이 그룹이 비공식적 으로는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전달했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모그룹 회 장비서실 간부는 “큰 뭉칫돈은 과거보다 줄었지만 정치자금 제공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면서 “중간보스들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인맥을 통 한 작은 뭉치의 거래는 여전히 물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뭉칫돈 줄었어도 쌈지돈은 여전

그룹 관계자들은 공식적 자리에서는 엄정 중립자세를 강조하지만 사석에 서는 “기업은 생리상 변화를 싫어하는 것 아니냐”며 속내를 은근히 내 비친다. 한 그룹의 임원은 “DJ에 대한 기업들의 거부감과 불안감이 전에 비해 많이 희석된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임원은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앞으로는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전을 펴야 할 상황인데 만약 지지율이 30%를 갓 넘는 약체정부가 들어선다면 일이 제대로 되겠느냐”면서 “특히 야권 이 집권할 경우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이 정책의 혼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요즘 국민회의의 돈 사정이 상대적으로 풍요하다는 소문이 많다는 것이다. 김대중 총재의 일산집은 찾아오는 사람들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공공연한 이야기까지 나온다. 또 증권가에서는 김 총재가 이미 천억대 이상의 대선 자금을 비축해 놓았다는 근거없는 루머 까지 돌고 있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중소업자들이나 자영업자들이 국민회의를 많이 찾는 것은 맞는 이야기 같지만 아직 대기업이 움직인다 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아무리 여권 후보의 인기가 떨어졌더라도 청와대와 안기부 등 권부의 눈 밖에 날 때 언제든 골탕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을 대기업들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그룹은 극비리 국민회의에 대한 줄대기에 착수하는 등 발빠 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그룹의 정보담당자는 “그룹이 호남 출신 임 원들을 앞세워 국민회의에 끈을 대려는 노력을 펴고 있으나 마땅한 사람 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요즘 각 기업들은 각 후보들의 집권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토대로 ‘비자금 포트 폴리오’ 작성에 골몰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삼성이 계열사 사장을 통해 국민회의의 한 당직자가 주선한 기자단 골프모임에서 스폰서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도 다른 그룹들은 일종의 양다리 걸치기작전이라는 해석이다.

삼성은 계열사 사장이 이 국민회의 당직자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여서 별다른 생각없이 후원을 했다는 해명이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상당수 대기업들은 자신 들이 뒷짐을 지고 있는 사이 경쟁기업이 국민회의에 줄을 대 기회를 선점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달 추석 직전에 모 기업이 김대중 총재에게 30억원을 전달하려다가 “공 식적인 지정기탁금으로 지원해 달라”는 요청에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 에 대해서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이다. 일부에서는 국민회의에 대한 지정기탁금 제공은 누가 먼저 하느냐의 문제만 남은 상 태라는 예상까지 하고 있다.


14대때보다 선거자금 크게 줄듯

지난 91년 50억원의 선거자금을 여당에 기탁한 전경련은 이번엔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 새 정부의 개혁과제를 정리한 일종의 제안서를 만들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각당 후보를 초청하거나 개별 방문하는 형식으로 전달할 계획이다. 또 각당의 공약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만들어 발표하는 문제도 검토중이다. 지난 6월 국민회의가 대화 를 요청했을 때 최종현 회장의 건강상 문제를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던 전 경련이 여야 후보를 공식초청하는 방안까지 검토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재벌그룹 관계자들은 현재의 눈치보기나 양다리 걸치기가 후보 간 합종연횡의 윤곽이 드러나는 10월 말 이후에는 사라지고 대신 줄서기 경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기업들이 부담하 는 대선 비자금은, 1조원을 훨씬 웃도는 돈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지난 14대 대선 때에 비해 파격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16일 제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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