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왕자의 난! 거사가 다가온다

(사진/반정을 꿈꾸는 사람들. 지난 9월1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오찬을 갖는 민주계 정발협 소속 의원들.)

방송 드라마 <용의 눈물>이 몇 달째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지금으로부 터 6백년 전인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도 이성계의 아들 8명이 하나뿐인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두차례에 걸쳐 골육상쟁을 벌이는 `왕자의 난'은 그 주요 줄거리다.


`38명 동반탈당설' 흉흉한 소문

1398년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은 방원의 난으로 불린다. 태조가 계비 강 씨 소생인 8남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전 왕비 한씨의 소생인 5남 방원이 중심이 돼 한씨가 낳은 왕자들이 방석 형제와 이들을 비호하던 정 도전 일파를 죽이고 세자를 바꾼 것을 말한다.

6백여년이 흐른 지금 신한국당의 복잡한 사정은 조선 개국초 왕실의 혼란 을 연상케 한다. 대선후보가 확정됐지만, 문민정부의 개국공신(민주계)들 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서자 출신(영입파)인 이회창 후보에 대한 반대와 교 체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전처 소생의 개국공신들은 `세자교체는 없 다'는 상황(김영삼 대통령)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전처 소생의 왕자인 이인제 경기지사가 선두에서 세자 교체를 추진한다 . 현대판 `왕자의 난'인 셈이다.

신한국당 민주계에 흐르는 이 이상기류는 우선 이들의 만남이 잦아졌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경선 패배 이후 가슴앓이만 하던 민주계 비주류 핵심 의원들이 초기  들어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공개, 비공개 회동을 잇 따라 갖고 있다. `38명 동반탈당설' 등 각종 흉흉한 소문도 나돌고 있다. 또 민주계가 중심이 된 `이인제 후보 신당' 창당설도 떠돈다.

지난 8월25일 서석재 의원이 김수한 서청원 김운환 의원, 이인제 경기지 사 등과 연쇄 회동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8월27일 범민주계 미옴이었던 정발협의 상임집행위원단 회의가 경선 이후 처음으로 열렸다. 또 9월1일 에는 여의도 63빌딩에서 서석재 의원 주재로 정발협 소속 의원 7여명이 만났다. 1일 모임에는 서청원 김찬우 김동욱 이강두 유용태 이재오 의원 등이 참석했다.

정발협 소속 민주계 의원들 모임의 성격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경선 때처럼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반이회창'만큼은 분명하고 후보 교체라는 ` 반정'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이 지사, 직접 연계돼 있는가

이들의 모임에서는 "이회창 후보로는 안 된다"는 말이 거침없이 오간다. 후보 교체를 당내에서 공론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1일 모임이 끝난 뒤 이재오 의원은 "각종 여론조사를 액면 그대로 수용해야 하며, 덮어두면 오히려 국민들의 염려만 커진다"면서 정권재창출을 위해 당이 더욱 솔직해질 필요가 있고, 국민 앞에 정직해져야 하며, 말하기 어 려운 점도 꺼내 공론화해야 한다"며 후보 교체 공론화를 시도했다. 서청 원 의원도 이날 이회창 대표로부터 당무위원 임명장을 수여받는 자리에서 "이 대표가 여론조사에서 추락하고 있고, 정권 재창출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당이 아무런 언급없이 넘어가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고 주장 했다. `후보 교체'를 정식으로 언급 안했을 뿐 사실상 논의의 물꼬를 튼 셈이다.

이인제 경기지사가 8월31일 중국 베이징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미 침묵과 순종의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신한국당 안에서 현재의 위기탈출 과 대선 승리를 위해 활발한 토의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한 것은 정발 협 민주계의 이러한 분위기와 맥락이 같다. 후보 교체론의 공론화를 은근 히 불지피고 있는 것디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정발협 민주계의 `반정' 계획에 이 지사가 직접 연계 돼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서석재 서청원 의원 등 정발협 지도부와 이 지 사가 그동안 몇차례 만나기는 했지만, 두 서 의원이 이 지사의 `거사'를 돕겠다는 데까지 얘기가 진전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주변의 관측이다. 하지만 이 지사와 이들 민주계 의원들이 `후보 교체'라는 단일 목표를 위 해 싸울 경우 결국 가는 길도 하나가 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유력하다. 현재 민주계의 부산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서석재 의원과 서 청원 김운환 의원 등이다. 모두 경선 때 반이회창 전선에 적극적으로 나 섰던 사람들이다.

이중 특히 서석재 의원이 가장 활발하다. 정발협의 공동의장으로서 반이 회창 진영의 사실상 조장이었던 서 의원은 경선 때 확실한 지도노선을 제 시하지 못한 채 이수성 고문과 이인제 지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행보 를 취함으로써 지도력에 상당한 상처를 입은 것으로 평가됐다. 이 점은 서 의원이 연일 정발협 핵심 의원들의 모임을 주재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민주계 좌장으로서의 실추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뭔가 큰 일을 도모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로선 현상을 타파해야 정치적 재기 가 가능하다.

경선과정에서 비주류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등장한 서청원 의원도 `식구' 를 거느린 보스로서 정치적 위상 정립에 적극적이다. 어차피 비주류쪽에 설 바에야 확실한 자기 목소리를 내야만 여권에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판 단이다. 그가 후보 교체 문제를 당내에서 공론화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갖 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경선 때부터 이 지사쪽에 확실히 줄을 선 김운환 의원의 경우는 목표가 비교적 분명하다.


안양 보선 졌으면 좋겠다?

이회창 대표쪽의 주력군 양성 작전은 이런 와중에 이들의 움직임에 불을 지르는 기폭제가 됐다. 이 대표가 지난번 시도지부장을 교체하면서 서청 원 김운환 김찬우 의원과 송천영 위원장 등 반이 진영에 섰던 인사들을 완전 물갈이한 데 대해 민주계 비주류가 크게 반발한 것이다. 이들은 "사 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정권을 잡기도 전에 우 리는 고사시키려는 것이냐"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김운환 의원은 "당 내 통합은 않고 무슨 대통합정치냐"면서 "누가 먼저 편가르기를 하는지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이 대표가 집권한 뒤에는 정치적으로 고사당할지 모른 다는 위기감이 뿌리깊다. 부산 출신의 한 의원은 "경선 때는 살생부가 나 돌더니 지금은 이 대표 주위에서 우리른 `손 보겠다"는 애기가 나돌고 있 다"며 "무슨 깡패집단이냐"고 흥분했다. 그만큼 이 대표쪽의 행동에 대해 두려움과 반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9월4일 경기 안양 만안 보궐선거 결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 대표의 책임론을 제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정발협의 한 핵심 관계자는 "보선에서 패배하고 나면 이 대표에 대한 회의가 당내 에서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때 일차 공격이 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의 보선 책임론은 자연스럽게 대선후보 교체론 으로 발전되리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자신들이 들고 나오면 이인제 지 사를 비롯해 이한동 박찬종 고문 등도 행동을 같이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가 이른 시일 안에 가시화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상 황 변화가 많은 데다가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확정된 후보를 교체하는 명 분을 만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발협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지금은 서 로 의견교환을 통해 공감대를 확인해나가는 정도"라며 '후보 교체론을 정 식 제기하는 것은 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수차에 걸쳐 "정치 일정에 변화는 없다"며 대안부재론을 공 개적으로 강조한 점도 비주류의 거사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들은 "김 대통령의 말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앞으로 따르지 않을 것"이라 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김 대통령의 말에 정면으로 거 스르는 행동은 쉽지 않아 보인다. 후보 교체론을 제기하는 순간 분당을 각오해야 하는데 김 대통령이 이 대표쪽을 지원하는 한 반정 세력이 힘을 얻기가 어려운 것이다.


거사 주체 불확실...지지후보 갈라질 수도

이러한 점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거사의 주체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주도자인 서석재 의원이나 서청원 의원은 지난 경선 때 서로 상처를 많이 입었으며, 현재는 비주류 리더십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다. 둘 중에 한명 으로 리더십이 통일된다고 하더라도 새로 추대할 `왕자'에 이르는 사정은 더 복잡해진다. 이인제 지사에서부터 조순 민주당 총재에 이르기까지 각 자 생각하는 대안이 다르다. 이 지사 지지파가 있는가 하면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한 조순 추대파도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지금은 현 위기상황 에 대한 대책만 논의할 때이지. 그런 구체적인 대안을 놓고 따질 때가 아 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칫 경선 때처럼 각 자 찢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또한 민주계 비주류의 정치적인 위상 문제도 걸림돌이다. 즉, 민주계 비 주류가 뭉쳐서 다른 어떤 후보를 밀 때 정치적 파괴력을 가질 수 있겠느 냐는 것이다. 민주계의 한 초선 의원은 "민주계가 일을 꾸민다고 해서 국 민들이 지지를 하겠느냐"면서 "민주계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고 말했 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한가위 때까지는 상황 변화를 지켜보자는 주장도 나오 고 있다. 한가위를 지나서도 이 대표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으면 청와대 부터 입장이 달라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정발협의 한 의원은 "당 총재직 을 이 대표에게 조기 이양하는 것이 이 대표 체제를 안정시키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 뻔한데도 김 대통령이 총재직 이양을 늦추고 있는 이유가 뭐겠느냐"면서 "김 대통령이 한 구석으로는 아직 딴마음을 먹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때는 손쉽게 `세자 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계 비주류의 왕자의 난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이 대표의 지지 율 끌어올리기와 행동을 같이할 당내 주력군 형성 정도에 달려있다고 하 겠다. 이런 점에서 이회창 후보를 만든 김윤환 고문의 정치적 태도도 신 한국당의 제1차 `왕자의 난'의 승패를 좌우할 주요 열쇠라고 하겠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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