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문화

고구려 유물 세계를 누빈다

(사진/고구려의 기상이 세계를 누비고 있다. 고분벽화사진전이 열리는 대영박물관 전시실에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세계문화!’ 이 한마디로 요약하겠다. 저 압록강 기슭에서 먼 유럽의 한 나라로 1천5백여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달려온 고구려 고분 무용총 사 나이의 출타 이유를 말하라면 말이다. 그는 동방의 한 존재를 세계에 알 리려 큰 걸음을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문제되지 않듯 나라와 문화의 차이도 그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는 동방의 문화를 알리러 왔다기보다 인류조상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 용맹한 그의 말발굽 아래 아직 먼지 바람이 이는 듯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사진전 ‘대고구려 대영박물관전’이 런던 대영박물관 2 층 대영도서관에서 지난 8월14일 개막돼 오는 11월16일까지 열리고 있다. ‘고구려문화예술연구회’와 (주)예당 공동주관으로 대영도서관에 70여평 규모로 꾸며진 이 전시회에는 중국 길림성 접안지역의 고분, 무용총, 북 한지역의 강서대묘 안악 3호분 등 고구려 고분 14기의 벽화사진 2백여점 이 전시되고 있다. 또 전시관에는 지난날 광활한 지역을 영토로 삼았던 시원한 고구려 지도, 성터 사진 등 각종 자료들이 함께 전시돼 고구려의 존재를 처음으로 대하는 이국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선연한 벽화 색체로 관객 압도

정작 영국 것은 하나도 없이 세계의 유물들만 모여있는 대영박물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들르는 이곳에 전시된 고구려 고분벽화 사 진들은 분명 세계를 향해 한국을 알리는 좋은 소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용총을 박차고 나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고구려의 인물들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문구 조차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화, 국제화를 구호로 부르짖고 있는 오 늘의 한국인들에게 고구려의 사나이들은 한국과 세계와의 경계를 자연스 레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존재 자체로 이미 그 성가를 획득하고 있는 것 이다. 당당한 눈초리, 거칠 것 없는 자세, 여유로운 미소는 절제된 자랑 스러움을 한껏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이후 오랜 역사 동안 뒤틀 리고 억압받아온 후손들의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하고 있었다. ‘주눅들 지 말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서라’고.

암갈색의 서가들이 양쪽 벽면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킹스 라이브러리의 중간에 전시관은 마련돼 있다. 높이 쌓인 책들이 빛을 모두 흡수한 탓인 지 별로 밝게 느껴지지 않는 조명이지만 벽화 사진들은 생명력을 잃지 않 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바람과 비, 그리고 인간의 손으로 더욱 훼손된 벽화를 사진 으로 본다는 것은 얼핏 무덤덤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서면 사진이 내뿜는 선연한 색채에 압도당하고 만다. 벽화 속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 손에 잡힐 듯한 율동은 그 전시장을 통로로 지나 가는 모든 이들의 눈길을 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생경한 표정으로 전시 장에 들어섰던 한 외국학생은 벽화 사진에 시선을 박고 한참이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사진/무용총의 춤추는 사람들 )

이번 전시회는 지난날 개관한 대영박물관의 한국관과 함께 한·영수교 2 백주년 기념행사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2백년의 역사가 온 전히 양국간의 이해증진에 바쳐지지 않은 탓에 이번 전시회로 한국예술을 처음 접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박물관 특별전이 열릴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런던의 중년부인 메리 틀레어(53)는 “한국에 이런 문화가 있 는 줄은 몰랐다. 이렇게 뛰어난 고분벽화를 가진 문화라니 한국인들은 자 랑스럽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해 열렸던 중국전에 깊은 인상을 받 고 동양문화에 심취했다는 그는 4층의 한국관을 보러 서둘러 자리를 떠났 다.

이번 전시회로 대영박물관을 찾는 많은 이들이 한국문화에 가까이 다가서 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의 자긍심도 더욱 높아지게 됐다. 그전까지 뒷문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방치되다시피 했던 우리 유물 들이 어엿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제는 특별전까지 열리는 것을 보 는 것이다. 한국어로 된 안내책자를 박물관 매점에서 사보는 것도 작은 기쁨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계기 마련

그러나 대영박물관에서 최초로 한국특별전을 기획한 예당의 진흥식(37)씨 는 “성공리에 전시회가 개최되긴 했지만 그간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고 털어놓았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그러했다. 고구려 고분이 중국영토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 문화라고 주장하는 것조차도 외교적 문 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북한지역 에 있으니 고구려 문화에 대한 애정은 안타까움으로만 쌓인다는 것이다. 중국과 나눠야하는 백두산과 장비이산, 두만강과 투먼강, 그리고 고구려 고분들, ‘고구려의 삼국통일’을 이국의 한 박물관에서 씁쓰레하게 상상 했다.

‘대고구려전’은 찬란한 문화를 지녔던 고구려를 세계에 소개하여 한국 의 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 말고도 좀더 실질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 유 네스코로부터 고구려 벽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하자 는 것이다. 영국의 스톤헨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나라를 넘어 인류가 모두 함께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법적장치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한 소 수민족의 지나간 흔적이라고 홀대받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좀더 적절하게 건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념과 국경으로 갈라져 지금은 남의 땅에 흩어져 있는 우리 것, 그 벽화의 색깔이 더욱 희미해지기 전에 고구 려 고분은 보호받아야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더욱 세계문화로 자리매 김 돼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런던=권은정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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