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추적

“미군 양민학살, 국가 배상하라”

(사진/영동군 노근리 학살현장에 선 유가족 서정구씨. 이 터널 안에서만 무차별 총격으로 2백50~3백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50년 7월26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이 넘어서는 때였다. 파죽지 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 인민군의 공세에 한국군과 미군은 악전고투를 계속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은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이맘때쯤이 되면 두 마을은 집집마다 모시는 제사로 분주하다. 47년 전 이 마을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가.


사망자 1인당 1억5천만원

지난 8월25일 충북 영동에 본부를 둔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 원회’는 “6·25전쟁 당시 미군들의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이 지역 주민 1백명 이상이 사망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 또는 상해 배상 신청서 ’를 청주지검에 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지역 후방이었던 영 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비행기가 피난민에게 폭격을 가하고 이어 인근 터널로 몰린 피난민들에게 미군이 4일 동안 총격을 가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게 대책위원회쪽의 주장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가 족은 사망자 43명의 유족과 부상자 2명 등 모두 23명으로, 사망자 1인당 1억5천만원의 손해배상 신청을 냈다.

대책위원회쪽이 밝힌 그날의 참상은 지난 47년 동안 묻혀왔던 사실치고는 너무나 비참하고 충격적이다.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종합해본 그날의 실상은 이렇다.

한국전쟁 개전 초 미군이 북한 인민군의 공격에 몰리고 있던 1950년 7월2 3일 정오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에 지프를 탄 미군 2명과 한국 경 찰관 1명이 찾아와 “이 마을이 전투지역으로 될 위험성이 있으니 마을사 람들 모두 마을을 비우라”고 소개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 이 마을로부터 남쪽으로 2㎞ 가량 떨어진 산간마을 임계리로 피난을 했다 .

7월25일 해질 무렵에 한패의 미군들이 임계리 마을에 들이닥쳐 “대구·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시켜준다”며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마을 어귀로 집합시켰다. 이렇게 집합된 3백∼4백명의 사람들은 이불과 농기구 등 봇 짐을 지거나 우마차에 싣고 미군들의 인솔 아래 피난길에 나섰다. 이 피 난민들의 행렬은 주곡리를 지나 경부선 철로와 나란히 난 서울-부산간 국 도를 걸어 부산쪽으로 향했다. 주곡리에서 약 1.5㎞ 떨어진 영동읍 하가 리 앞까지 왔을 때는 이미 밤중이었다. 행렬을 인솔하던 미군들은 모든 사람들을 도로 오른쪽 하천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서 그 곳에서 밤을 새도 록 명령했다. 피난민들은 여기서 밤새 미군 차량 행렬이 부산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쌕쌕이 폭격 뒤 기관총탄 세례

이튿날인 26일 날이 밝았을 때 피난민들을 감시하던 미군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피난민들은 인솔자없이 도로위를 걸어서 남쪽으로 피난길 을 계속했다. 저녁과 아침식사를 굶은 채 뙤약볕 속을 걷느라 모두 기진 맥진한 상태였다. 정오쯤 됐을까, 갑자기 대열 앞쪽에 미군병사 4,5명이 나타나 총구를 들이대며 이들 모두를 철로 위로 올라가게 했다. 미군 병 사들은 피난민들의 짐을 모두 수색한 뒤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을 하고 는 사라졌다.

(사진/미군들은 이 터널 속으로 피난민을 몰아넣고 양쪽 야산에서 무차별총격을 가했다. )

잠시후 정찰기에 이어 ‘쌕쌕이’ 두대가 나타났다. 어리둥절하던 피난민 들 머리 위에 폭탄과 기관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순식간에 철로 레일 이 엿가락처럼 휘고 사람들과 수레를 끌던 소가 갈기갈기 찢기어 하늘로 솟아올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왕좌왕 뛰어다니다 경부선 철로 밑에 나란히 난 2개의 아치형 터널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 터널은 각각 바닥 너비 7.1m, 길이 23.7m, 높이 10m로, 지금은 이 두개의 터널 중에서 하나 를 포장해 도로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모두 개울물이 흘렀다.

미군들은 터널 속에 대피한 사람들을 향해 앞뒤쪽 야산에서 밤낮없이 기 관총을 쏘아댔다. 터널 안 콘크리트 벽에서 연신 불꽃이 튀었다. 사람들 이 계속 쓰러졌고, 터널 안은 비명과 울음소리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간 시체가 철로와 냇가 그리고 터널 속에 즐비하게 널렸다. 이 학살은 미군들이 인민군에 밀려 노근리에서 후퇴한 7월29일 오전까지 4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대책위원회쪽은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1백명에 중상자 18 명이나 신원 미상의 피해자를 포함하면 사망자가 2백50∼3백명에 이를 것 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농현상이 있기 전인 70년대까지 만해도 이 기간에 주곡리와 임계리 두마을에는 해마다 70∼80건의 제사가 몰려 있었으며,지금도 30여건의 제사가 치러지고 있다.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은용(74·대전 가수원동)씨는 “그동안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고 살다가 문민정부 이후 지난 94년부터 진상 규명 과 손해배상을 위해 나서고 있다”면서 “당시 참상을 증언해줄 생존자가 모두 죽기 전에 진상조사와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신으로 ‘바리케이드’… 핏물 먹으며 버티다

임계리에서 시부모와 아들딸을 데리고 피난행렬을 따라나섰던 정씨의 부 인 박선용(72)씨는 미군들의 폭격과 총격으로 여섯살배기 아들과 두살배 기 딸을 잃었다. 박씨는 “철로 위 폭격이 있은 뒤 미군 위생병 2명이 터 널 안으로 찾아와 부상자들을 치료했는데, 나에게도 파편에 맞아 다친 팔 꿈치에 붕대를 감아줬다. 미군이 돌아간 뒤 바로 총성이 울리더니 터널입 구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양쪽에서 계속되는 총격에 사람들이 잇따라 쓰 러지고 사람들이 총알이 안닿는 터널 가운데로 우르르 몰려왔다. 밤이 되 어 총격이 뜸해지자 시어머니는 배고픔과 더위에 지쳐 울어대는 딸을 달 래기 위해 등에 업고 터널 밖으로 나갔는데 곧 심한 총성이 나고 시어머 니가 울먹이며 들어와 ‘딸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면서 눈시울 을 붉혔다. 박씨는 아들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들손을 붙잡고 어둠 을 틈타 터널을 빠져 나왔다. 한참 산등성이를 올라가는데 골짜기 위쪽에 서 총탄이 쏟아졌다. 아들의 다리는 총탄에 맞아 허벅지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아이를 업고 다시 뛰자 또 총소리가 났다. 옆구리에 불같 은 것이 확 박히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아들이 축 늘어졌다. 총알이 자신 의 오른쪽 옆구리를 스친 뒤 아들의 가슴에 명중한 것이다. 쓰러진 박씨 에게 다가온 미군 2명이 죽은 아들을 보자기에 감싸 근처에 묻었다. 박씨 는 들것과 차량에 실려 김천 야전병원으로 후송했다. 박씨의 옆구리에는 아직도 10㎝ 가량의 상처가 남아있으며, 오른쪽 손등에도 파편이 박혀 있 다.

당시 철로 위의 폭격으로 할머니와 오빠, 남동생이 숨지고 자신도 왼쪽눈 을 잃은 양해숙(59·여)씨는 “당시 할머니가 있던 자리에 폭탄이 떨어져 주변에는 시신조차도 남지 않았다. 그 때 내앞으로 불이 확 올라오면서 폭풍이 일었다. 어머니는 동생과 나를 감싸 안고 엎드렸다. 폭격의 충격 으로 왼쪽 눈알이 빠져 달랑거렸는데 무언지도 모른 채 무서워서 손으로 잡아 떼었다”고 말했다.

미군의 총격이 계속되자 터널에 피신해 있던 청장년층 가운데 많은 사람 들이 개죽음을 할 수 없다며 어둠을 이용해 탈출했으나,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은 사흘 동안 터널에 갇혀 총알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12세였던 정구호(59)씨는 “희생자들이 터널 주변과 개울바닥에 널 려 있어 일부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막기 위해 시신들로 바리케이드 를 쌓기도 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개울을 흐르는 핏물을 떠먹으며 나 흘을 버텼다”면서 “당시 어머니가 나를 안쪽으로 앉히고 바로 앞에 앉 아 계셨는데 온몸에 다섯군데나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다”고 증언했다.


“오인사살 아닌 계획적 학살”

(사진/터널 안의 탄흔은 아직도 선명하다. 무차별 총격의 증거다. )

정은용 대책위원장은 “사건 생존자들이 미군의 살상 행위를 증언하고 있 으며 노근리에 있는 사건 현장 터널의 콘크리트 벽에 미군의 총격으로 인 한 수많은 탄흔이 남아 있는데도 미군쪽은 학살 사실을 발뺌하고 있다” 고 말했다. 정씨는 지난 60년 10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미국정부가 서울 에 운영했던 소청사무소와 미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아무런 회 답도 받지 못했다. 그동안 이 사건의 입증자료를 수집해 지난 94년 7월과 10월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클린턴 대통령 앞으로 사과 및 손해배상청구 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내는 동시에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를 보 냈다. 그러나 주한 미군 배상사무소쪽에서는 “미국은 미군이 적과의 전 투과정에서 야기한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냈 을 뿐이다. 배상사무소쪽은 또 “이번 회신이 사무소의 최종 결정이며 최 종 회신”이라고 못박았다.

대책위원회쪽은 그러나 노근리 양민학살은 적과의 교전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민군이 사건현장에 진격해 오기 전 미군들이 우리 피난민들에 대해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감행한 살상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한 미 제1기병사단의 사단사와 일본 육전사연 구보급회가 발간한 <한국전쟁>, 북한쪽의 <조선인민보> 등 각종 자료에 따르면 7월29일 오후에야 인민군이 노근리 사건 현장까지 진격한 것으로 돼있어 그 이전까지 사건 현장에서 미군과 인민군의 전투행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또 확인된 사상자 1백18명 가운데 청·장년층 남자는 불과 21명뿐이고 97명은 노인들과 부녀자 및 어린이들인 점으로 보더라도 전투중의 오인사살로는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생존자들은 “터널 안으로 치료를 해주러 온 미군 위생병이 ‘대전에서 피난민을 가장한 인 민군에게 우리 미군이 엄청나게 당했다. 따라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엄명이 내려졌다’고 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각종 전사에 따르면 “인민군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미군 방어선을 지났다가 옷속에 감춘 총으로 뒤에서 미군을 공격해 피난민 통제강화와 민간인에 대한 검색을 강화했다”고 적고 있다.

배상소송을 접수한 청주지검쪽은 “한미 행정협정과 관련된 사안이므로 주한미군 배상사무소와의 협의를 거친 뒤 차장검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배 상심의위원회를 열어 신청인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 다.

정 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피해자들이 모두 숨지기 전에 진상규명과 손해배상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미국쪽이 발뺌을 하고 있 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우선 희생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주고 다음 에 미국에 대한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 모두 숨지기 전에…

“미군들이 왜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겠느냐라고 묻는다면 저도 답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미군들의 폭격과 총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폭격현장 인근에는 미군기로부터 투하 된 폭탄의 파편이 남아있을 것이고 터널 부근에도 그들이 쏜 총알이 남아 있을 것이니 한미 양국군이 합동으로 탐지기를 동원하면 이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 위원장은 “당시 일가족이 몰살한 집이 5가구나 되고 대책위원회에 피 해 신고를 하지 않은 가족들도 있어 계속 희생자 숫자를 파악하고 있다” 면서 “손해배상에 이어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탑 건립과 미국쪽의 공식 사과도 받아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동=지창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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