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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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기용제 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대우 옥포조선소 노동자 하씨. 손등에 종이조차 올려 놓지 못할 만큼 신한 손떨림에 고생하고 있다.)
대우중공업 옥포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이아무개(40)씨는 부인한테 “그 나이에 벌써 건망증이냐”는 핀잔을 받을 때마다 머쓱해지곤 한다. 외출 한 뒤 몇분 지나지 않아 “가스를 잠갔냐”고 부인을 채근하고, 승용차를 주차한 뒤에는 차문을 잠갔는지 다시 가서 확인하는 일이 거의 매일 반복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와서는 전화번호부를 어디에 두었는지, 시 계는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해 늘 부인을 괴롭힌다. 그래서인지 부 인의 짜증도 부쩍 심해졌다. “아내의 타박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아빠 이상해졌어’하며 얼굴을 빤히 쳐다볼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두통약 없이는 하루도 못견뎌
이씨와 똑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늘자 회사와 노조는 공동으로 아주대병원에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올 8월 최종적으로 나온 검사결과에 서 이씨는 유기용제 중독으로 인한 ‘인지기능장애’와 ‘말초신경장애’ 중증 판정을 받았다. 그제서야 그는 ‘건망증’의 비밀을 알게 됐다. 나 이 탓이 아니라 유기용제 중독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였던 것이다. 유기용 제를 다루는 다른 동료 노동자 679명 가운데 64명도 ‘뇌기능 신경장애’ 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14명의 노동자들은 말초신경질환자로 밝혀졌다. 기억력 감퇴와 만성적인 두통, 평형기능의 상실, 무력감, 불면 증, 심리적 불안감, 손발 떨림 따위의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씨는 도장부 소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선박에 페인트칠 하 는 작업만을 해온 것이 벌써 12년째다. 입사하기 전부터 체력만큼은 자신 이 있던 터라 역겨운 시너 냄새를 빼고는 별 탈없이 견뎌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92년도께부터 머리가 깨지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일주일에 한 두차례 있던 두통은 언제부터인가 만성적으로 돼 버렸다. “지금은 아예 두통약을 입에 달고 살아요. 안 좋다는 것은 알지요. 하지만 약을 안 먹 고는 잠을 잘 수도, 작업을 할 수도 없습니다.” 아침에 통근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는 것도 유기용제 탓인 것 같다. 퇴근 무렵이면 헛구역질이 나 고 시커먼 가래에 피가 섞여 올라온다. 몸안에 쌓여 있던 유기용제가 서 서히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소의 작업공정은 용접과 도장 이 전부라고 할 정도로 도장의 비중이 높다. 72m 높이의 대형 크레인이 조선소의 상징인 것처럼, 배의 조립단계에서부터 마무리 공정에 이르기까 지 도장작업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엄청난 양의 유기용제를 사용 할 수밖에 없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고체 형태의 도료를 녹이기 위해서 는 각종 유기용제를 섞은 시너로 묽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너에 들어가는 크실렌과 에틸벤젠 같은 각종 유기용제가 뇌신경 기능이나 말초 신경 장애를 일으키는 주범인 것이다.
시너와 도료를 섞어 희석된 페인트는 압축공기가 흐르는 호스를 통해 밖 으로 강하게 분사된다. 분사압력이 어찌나 센지 철판에 부딪힌 페인트 분 무들이 2~3m 가량 사방으로 흩어진다. 10여m 떨어진 곳에서 작업을 지켜 보는데도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안경이 뽀얗게 얼룩진다. 진동하는 시너 냄새가 머리를 멍하게 만들고, 목구멍도 금세 꽉 막힌다. 다른 작업장 노 동자들도 도장작업장 근처에는 접근하기를 꺼릴 정도다.
그나마 노동자들이 현재 착용하고 있는 송기마스크(보호구)나 방독마스크 가 개인별로 지급된 것은 불과 몇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전에는 회사에서 지급하는 수량이 부족해 일부 노동자만 착용했다는 것이다. 다른 조선소 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전의 작업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송기마스크나 방독마스크조차도 유 해물질을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주대병원의 역학조 사에 따르면 송기마스크의 유기용제 외부차단율은 평균 80%에 지나지 않 는다. 게다가 착용감이 불편하고 작업능률에 지장을 줘 노동자들이 사용 을 꺼리는 형편이다. 이런 이유로 수건만으로 얼굴을 두른 채 작업하는 모습이 작업현장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시너에 취해 작업중 콧노래는 예사
(사진/현대중공업 노동자 김문배씨. 온몸이 붉은 반점투성이가 될 정도로 피부염에 시달리고 있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면역기능을 떨어뜨리는 백혈구 감소 증세다. )
선행도장부에서 11년을 넘게 근무해온 하아무개(57)씨. 그는 인터뷰 내내 옆에서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손과 발을 후둘후둘 떨었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주겠다며 그는 백지 한장을 집어 들었다. 두팔을 앞으로 쭉 뻗은 뒤 종이 한장을 손등에 올려 놓는다. 손등이 위아래로 심하게 떨 리면서, 손등에 놓여 있던 종이가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씨가 이상증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부터라고 한다. 조금만 긴장하면 앞뒤가 안맞는 말을 하거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초기 증상 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손과 발까지 떤다. 최근 들어 잦아진 부부싸 움이 늘 하씨의 판정패로 끝나는 것도 이유가 있다. 1시간만 지나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사람이 결연한 표정으로 ‘우리 얘기좀 하자’고 하면 저는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 이 가물가물한 거예요. 그러니 매번 질 수밖에 없지요.”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막연하게 짐작해 왔던 것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고 생각한다. 도장부 노동자들의 가정 불화가 다른 부서보다 심한 게 유 기용제 중독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업도중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시너에 의한 환각작용 때문이다. 신경장애뿐만 아니라 피부질환도 심각하다. 선박용 페인트는 독성이 강하 다. 배와 바닷물이 닿는 부분이 염분에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또 한 따개비 같은 바다생물이 달라붙으면 배의 속도가 떨어진다. 이것을 막 기 위해 독성이 강한 유기용제를 섞어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다. 페인트 한방울을 피부에 살짝 묻힌 뒤 1시간 정도가 지나면 살갗이 풍선처럼 빨 갛게 부풀어 오른다고 노동자들은 말한다. 실제로 도장 노동자들의 목부 위는 유기용제에 노출돼 빨갛다 못해 시커멓기까지 하다.
백혈구 감소로 면역기능도 떨어져
현대중공업 김문배(43)씨. 긴소매 작업복에 가려져 있던 붉은 반점이 인 터뷰 도중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보였다. 이것도 유기용제 때문 이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웃통을 벗었다. 붉은 반점들이 마치 두드러 기처럼 솟아나 있었다. 목 부위의 피부는 불에 그을린 것처럼 새까맣다. “여름철에도 창피해서 반팔소매를 못 입고 다녀요.”
하지만 접촉성 피부염쯤은 그에게 대수로운 병이 아니다. 보기에는 흉하 지만 그저 여름에 조금 덥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백 혈구 감소’라는 훨씬 더 심각한 병이다. 유기용제에 의해 파괴된 백혈구 수가 언제 정상적으로 돌아올지 기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백혈구 감소 는 면역기능의 저하로 이어져 늘 노심초사해야 한다. 겉보기에도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입술에는 하얀 백태가 끼어 있고, 손바닥 피부도 허옇 게 일어나 있다.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의 몸쪽으 로 자꾸 의자를 당겨 앉아야 했다.
곰곰이 돌이켜 보면 작년부터 이미 인체의 면역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고 한다. 집에만 오면 사지가 축 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2~3일이면 뚝 떨어지던 감기도 일주일이 넘도록 영 낫지 않았다. 체한 듯하면서도 어지러운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서 결국 그는 올 1월 병 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백혈구 감소’말고도 ‘저세포 성 골수’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새로 만들어지는 세포수가 줄어 들면서 결국 피부가 노화되는 현상이다. 처음 보았을 때 나이가 쉰은 넘 었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씨에게 백혈구 감소와 저세포 성 골수 질환을 안겨준 것은 셀로솔브계라는 유기용제다. 이 유기용제는 생식기와 조혈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직·간접으로 유기용제를 다루는 노동자는 조선업계를 비롯해 건설 ·전자업계 등 14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사회문제가 돼 여론의 환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고작 벤젠과 솔벤트5200 정도뿐이다. 벤 젠은 지난 93년 포항제철에서 근무하던 신영배씨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숨지면서, 솔벤트5200의 경우는 95년 엘지전자부품에서 여성근로자들이 집단중독되면서 유해성이 환기된 것이다.
노동자는 물고기만도 못한 존재요?
결국 사건이 터져야만 역학조사가 이루어지는 현재의 산업보건체계 속에 서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유기용제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는 것이다. 현재 요양중에 있는 현대중공업의 한 노동자는 자신에게 반문하듯 낯선 외지인을 붙잡고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물고기보다 못한 존재인가요? 물고기를 살리자며 그렇게 돈을 대주는 회사가 직업병에 걸린 우리한테는 …. 하기야 언론도 마찬가지지요 뭐.”
이용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