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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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뽀얀 페인트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도장작업중인 대우조선 노동자. 역학조사에서 64명의 노동자가 뇌기능신경장애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은 1년에 2차례씩 ‘특수’검진을 받도록 돼 있다. 그러나 특수검진을 통해서 직업병이 조기발견된 적은 거의 없다 . 지난 88년 15세 나이에 수은 중독으로 숨진 문송면군 사건이나 원진레 이온 사건 등은 특수검진에서 모두 ‘이상없음’ 판정이 나왔다.
유기용제 중독 단 한명도 못찾아
대우중공업 옥포조선소 노사가 공동으로 아주대병원에 의뢰해 유기용제 취급 노동자 67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학조사에서도 뇌기능신경장애자 가 64명(9.5%)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대우옥포병원에서 정기 적으로 실시한 특수검진에서는 단 한명도 유기용제 중독이 보고되지 않았 다. 게다가 대우 옥포조선소의 도장 협력업체 노동자 196명에 대해 ‘법 적인 유기용제 특수건강진단’을 시행한 결과 단 한명도 직업병 유소견자 가 발견되지 않았다. 작업환경이 더욱 열악한 하청업체에서 유소견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상식이 어긋난 것이다. 현행 특수검진 항목과 평 가방법이 얼마나 허술한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산업안전선진화기획단의 자료도 이같은 사실을 입증해준다. 특수검진을 통해서 보고되는 직업병 유소견자는 1년에 3천여명 안팎에 그친다. 비슷 한 산업구조를 갖고 있는 일본이 7만여명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20분의 1 밖에 안 되는 수치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유소견자 가운데 엑스레이 촬영 이나 청력검사로 쉽게 판별이 가능한 진폐증과 소음성난청이 전체의 98% 를 차지한다. 반면 일본은 유기용제 중독이 33.5%로 제일 많고, 진폐증과 소음성난청은 55%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특수검진이 진폐증과 소 음성난청을 제외하면 직업병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길승 성수의원 원장은 “외국에서는 흔한 직업성 피부염 이나 직업성 암이 거의 보고되지 않는 것에서도 검진제도의 허점이 잘 드 러난다. 직업병 진단이 위험상태에 있는 노동자를 제대로 걸러주는 역할 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실제로 현장 노동자들이 밝히는 특수검진 백태는 다소 과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기가 막힐 정도다. 역학조 사에서 중추신경장애와 말초신경장애 판정을 받은 옥포조선소의 하아무개 (57)씨. 그는 2∼3년 전부터 특수검진을 받을 때마다 유기용제 중독 증상 을 호소했다. 손발이 떨리고 두통이 심하고, 기억력이 갑자기 뚝 떨어지 고…. 하지만 검진 의사로부터 돌아오는 대꾸는 싸늘했다. “밥 잘먹고 잠 잘자면 돼요.” 그는 또 이런 ‘처방’도 받았다고 한다. “머리 아프 면 두통약 사먹으세요.”
진료시간 1분, 노동자 불신만 키워
현장 작업환경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적인 의사들이 검진을 하 고 있으니 병을 조기발견해 치료한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정형외과 의사들이 검진을 하더군요. 비전문가인 건 둘째 치 고라도 우리가 일하고 있는 작업장을 한번이라도 둘러보고서 검진했으면 좋겠어요.” 하씨의 넋두리다. 전문인력 부족에다 의사들의 무성의까지 겹쳐 검진기관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는 것이다.
김아무개(40)씨가 털어놓는 경험담도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는 특수검진 에서 받은 검사 항목을 쭉 늘어놓았다. “피검사, 시력검사, 청력검사, 엑스레이…. 아, 빼먹은 게 있어요. 키와 몸무게도 쟀습니다. 뇌신경기능 장애요? 그런 건 아예 묻지도 않아요,”
특수검진을 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몇분에 불과하다. 심지어 어떤 사람 은 30초 정도밖에 검진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화장실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 정도에 직업병 검진이 뚝딱 이루어져 버리는 것이 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연세대 예방의학 교실이 95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상자 1인당 검진시간은 30초∼1분(17. 6%), 1∼3분(58.8%)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병을 발견하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의사 한 사람이 하루에 검진하는 대상자 수가 1백명 이상인 곳이 80.6%로 나타났다. 3백명 이상인 곳도 5.9%에 달 했다. 일본의 경우 의사 1명이 하루에 검진하는 숫자가 많아야 15명인 것 을 볼 때 황당하기조차 하다. 노동자들의 검진이 형식적이다 못해 병원의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탓에 지정병원의 검진결과에 대해 노동자들은 전혀 신뢰하고 있지 않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지난해 단체협약에서 유기용제 취급 노동자의 역학조사를 공동으로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현재 역학조사 진행은 중지된 상태다. 노사가 검진기관 선정을 둘러싸고 대립해 있기 때문이다. 회사쪽은 종전대로 특수검진을 실시하던 울산대병원(전 해성병원)에서 역 학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노조는 울산대병원이 현대 계열사인 데다, 지금까지의 검진결과로 미뤄 역학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울산대병원은 매년 작업환경 측정 및 특수건강검진을 연간 2차례씩 실시해 오면서도 이상이 있다고 보고한 적 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기용제와 달리 근골격계 질환이 아예 특수검진 대상에서 제외돼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특수검진은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직업병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아무런 장치도 마련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근 골격계 질환을 검진과정에서 조기에 발견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새롭게 제기되는 직업병에 속수무책
현대중공업 변아무개(55)씨(앞 페이지 박스기사 참조)가 검진과정에서 들 은 이야기는 단 두 마디였다고 한다. “앉았다가 일어나 보세요. 정상이 네요.” 그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곧장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 병의 발 견부터 치료까지가 온전히 개별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 72년부터 실시된 특수건강검진은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직업병을 조기에 발견하고 현재의 건강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적절한 사후조치를 취함으로써 근로자의 건강보호 및 노동생산성 향상에 기여함 을 목적으로 실시한다.” 하지만 특수건강검진의 취지는 빛바랜 액자 속 에만 담겨져 있을 뿐이다.
이용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