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헌재, 낮은 곳으로도 임하라

9월1일로 창설 9주년을 맞은 헌법재판소가 퇴직금 우선변제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노동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헌재의 결정내용을 보면 노동계의 이같은 반발은 예정된 것이었다. 헌재 는 지난달 21일 기업 파산시 최종 3개월 임금과 퇴직금, 재해보상금 등을 다른 채권에 우선해 변제토록 한 근로기준법 37조 2항 중 퇴직금 부분은 침해의 최소성과 법익의 균형성에 저촉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또 연말까지 관련 조항을 개정하지 않으면 98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이 자동상실되며 개정 때까지 퇴직금 부분의 적용을 중지토록 했다.


노동자에게 도산 책임 전가

헌재가 이번 결정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크게 3가지. 첫째는 우선변제 퇴 직금 액수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아 저당권 등을 설정하고 기업에 돈을 빌려준 금융업자들의 채권확보에 결정적 장애를 준다는 것(‘담보물 권제 의 본질 훼손 및 최소침해원칙 저촉’으로 표현). 두번째는 우선변제할 퇴직금 총액이 클수록 기업의 담보가치가 감소돼 기업이 빌릴 수 있는 돈 의 규모가 적어진다는 것(기업금융 위축). 세번째는 기업경영악화와 도산 에는 노동자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는 만큼 기업을 위해 자금을 제공한 3 자를 희생시키고 그 기업의 노동자를 우선 보호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법익의 균형성 저촉).

노동계에서 보면 헌재의 이같은 논리는 금융업자와 사용자의 입장만을 고 려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오히려 기업경영 악화와 도산의 책임만을 전가한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헌재도 이를 의식한 듯, “도산위기에 있는 기업일수록 금융기관 등이 자금 제공을 꺼리게 되고 그 결과 기업이 도산 하면 노동자도 자리를 잃는 등 노동자의 복지에도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 다”며 종업원 퇴직보험제 개선과 기업연금제도 도입, 활용 등의 보완책 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험보험이나 퇴직보험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퇴직금이 실업 이나 정년퇴직시 유일한 생계수단인 상태에서 이같은 ‘립서비스’(Lip S ervice)는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헌재 결정 하루 만인 지난 8월22일 서울지법의 경매담당 7개 단독 재판부는 법개정 때까지 부도회사 및 사주의 재산처분을 위한 경매사건에 서 퇴직금 배당처분을 보류키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서울지법 민사51 단 독 박시환 판사는 이날 부도난 S화학 사주 강모씨의 개인자산 강제경매에 서 근로자 17명이 우선변제를 요구한 퇴직금 6천5백여만원의 변제를 보류 했다.

특히 노동부에 따르면 97년 6월 말 현재 퇴직금이 정산되지 않은 근로자 가 4백66개 업체 6천6백24명으로 이들의 퇴직금 액수만 무려 7백31억에 이른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의 수위가 높은 것도 당연하다.

헌재가 노동자의 기본권리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을 보여준 것은 어제 오 늘 일이 아니다. 헌재는 지난해 12월 방송, 지하철 등을 공익사업으로 규 정, 이들의 노동쟁의를 강제 중재토록 한 노동쟁의 조정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려 노동계의 반발을 샀다.

헌재의 당시 결정문도 이번 퇴직금 우선변제 관련 결정문보다 덜하지 않 다. 헌재는 “우리 노사관계는 사용자쪽의 권위적, 고압적 자세와 근로자 쪽의 자치역량 부족으로 마치 한풀이식 폭력적 대응이 맞물려 노사쌍방이 극한적 대립양상을 보이며 심지어 정치적인 투쟁으로 나가는 경향이 없지 않다”며 “따라서 우리 노동관계법은 노사관계에 대해 다분히 향도적, 후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헌재는 이어 퇴직금 우선변제 결 정문에서 보여준 기업과 경제우선주의 논리를 전개했다. “치열한 국가간 의 무역경쟁에서 국제경쟁력을 제고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만큼 과도한 노동쟁의 행위는 해당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전반의 경 쟁력을 저하시켜 궁극적으로 해당 기업의 근로자는 물론 국민전체의 복지 에 오히려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힌 것.


부당노동행위 구제명령도 위헌 판정

헌재는 또 지난 95년 3월에는 노동위원회가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해 내린 구제명령을 사용자가 이행하지 않을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노동조합법 제46조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법원에서 위법부당성이 확정되지 않은 구제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용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합리성이 결여 돼 있다”고 밝혔다.

헌재의 이같은 논리는 일견 법적 원칙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 대부분이 노동위원회의 구제명령을 이행하지 않기 위해 온 갖 수단을 동원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익사업장의 강제중재 합헌결정에 서 보여준 ‘현실인식’과 ‘노동관계법의 향도적 후원적 성격규정’을 이 결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데 대해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에도 헌재는 그간 사립학교 교원들의 노조결성 금지에 대해 합헌결 정을 내리는 등 노동자 입장에서 불리한 결정을 몇차례 내놓았다.

물론 헌재로서도 할말이 없지 않다. 퇴직금 우선변제조항 헌법불합치 결 정의 경우 합리적인 우선변제의 범위를 정하라는 것일 뿐 우선변제 자체 를 금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 즉 공은 국회로 넘어간 만큼 노동계가 주장 하는 8년치 퇴직금 우선변제 수용여부는 국회의 법개정에 달려 있다는 것 이다.

또 최근 일본에서도 전후세대의 일시적 퇴직에 따른 퇴직금 재원부족으로 퇴직금 제도의 개정이 논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선변제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정도는 필연적 조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공익사업장 강제중재 합헌결정과 관련해서는 9명의 재판관 중 5명이 위헌 의견을 냈으나 재판관 6명 이상이 위헌의견을 제시해야 ‘위헌’으로 최 종 결정되는 헌법재판소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헌으로 결론났다는 변 명도 나온다.


소외계층에게는 상대적으로 인색

헌재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정치, 사회, 문화적 현안에 대한 진보적인 결 정으로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점을 감안하면 퇴직금 관련 결정만으 로 헌재의 보수성을 논하는 것은 성급한 분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 7월16일 헌재는 지난해 말 노동관계법 및 안기부법 날치 기 통과와 관련한 권한쟁의 사건에서 “날치기통과는 의원의 법률안 심의 , 표결권한을 침해한 국회법위반”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국회에 안기부법 재개정 의무를 부과했다. 또 같은날 4백여년간 계속돼온 동성동본 금혼규 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5만여쌍으로 추산되는 동성동본 부부 에게 잃어버린 권리를 돌려주었다. 이와 함께 지난해 10월에는 영화상영 전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도록 한 영화법 12조 1항이 언론 출판 의 사전검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창작 영역을 확대시 켰다. 그러나 헌재가 권력과 관습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해나가고 있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적 경제원리와 그 상부구조인 법률에 의해 보장 된 기득권을 지나치게 존중함으로써 국가공권력의 피해자와 같은 소외계 층에게 상대적으로 인색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헌재는 지난 7월16일 삼청교육대 피해자가 “88년 대통령이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 대해 적법한 보상을 약속하고도 10년간 이를 지키지 않아 권 한을 침해당했다”며 입법부작위 헌법소원을 제기한 데 대해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다”며 본안 심리도 없이 각하했다.

이에 앞서 95년 3월에는 구미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수감중인 황대권씨가 자신을 고문한 안기부 수사관들에 대해 검찰이 공소시효(7년) 만료를 이 유로 불기소 처분하자 제기한 ‘불기소처분 취소소원’을 역시 각하했다. 헌재는 “공소시효가 완성된 피의사실에 대해 공소제기가 불가능하므로 이에 대한 헌법소원은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어 부적합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인권규약이나 영국 미국 등 선진국들이 고문에 대한 공소시효 를 두고 있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이같은 결정은 기존 법률적용에 지나치 게 천착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헌재가 법률로 보장된 기득권에 대해 너그러운 예도 적지 않다. 헌재는 지난 8월21일에는 민주당이 ‘정당 국고보조금 중 절반을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에 한해 균등배분토록 한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은 평등권 침 해’라며 제기한 헌법소원을 헌법소원제기 기간초과를 이유로 각하했다. 지난 4월에는 ‘정치자금 기탁서식이 집권여당에 대한 편중기탁을 유발한 다’는 국민회의 의원의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역시 각하결정을 내렸다. 이에 앞서 3월에는 현역의원의 의정보고 활동을 규정한 통합선거법 111조 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려, 현역의원의 기득권을 뒷받침했다. 이밖에 검찰 총장의 퇴임 후 2년간 공직취임 금지조항에 대한 위헌결정이나 20세미만 선거권 제한 조항에 대한 합헌결정 등도 기득권보호와 맥을 같이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국민적 지지 받기 위한 노력 기울여야

헌재의 결정은 헌법에 기초해 한 사회의 가치관과 규범의 기준을 제시하 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판단이다. 따라서 헌재 결정이 한 사 회에 미치는 파장은 깊고도 넓다. 지난 9년간 헌재는 권력의 우산 아래에 서 법의 토대 위로 자리를 옮겨앉는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필연적으로 산출해내는 소외 계층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 서 유년기를 넘어 청소년기로 접어든 헌재가 제4부로서 국민들 사이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좀더 따뜻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적이다.

박민/ 문화일보 사회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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