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대선가는 길 정의는 없다

(사진/이제 역사는 5·18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5·18을 정략적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비난이 높다.)


5.18 관련단체들과 사전 교감?

국민회의와 신한국당은 전·노 사면문제를 연말 대선에서의 득표력 확대 와 정국주도를 위한 승부수로 삼으려는 경쟁이 한창이다. 경쟁의 빗장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먼저 열었다. 지난 8월30일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전·노 사면의 전제로 내세웠던 ‘사과와 반성’이 라는 조건을 철회하고 ‘용서론’을 펼쳤다. “사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용서받을 사람이 먼저 용서받을 일을 해야 한다”며 국민적 합의가 있다 면 수용할 수 있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분들이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사면을 적극적으로 주창 하고 나선 것이다.

더욱이 김 총재는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안 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의 “추석 전 특별사면”을 건의할 방침이라는 사실이 대서특필된 9월1일 오전 서울방송의 ‘대통령 후보와 함께’라는 토론회에 참석해 “현실적으로 양쪽이 사면을 놓고 경 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먼저 주장했고 여당이 따라오는 것”이라며 자신이 먼저 나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김 총재의 이런 태도 변화는 연말 대선을 의식한 표계산 결과다. 그동안 김 총재 주변에서는 사면문제에 대한 입장 변화의 움직임이 조금씩 감지 돼 왔다. 지난 5월 광주를 방문해 윤공희 대주교 등과 사면문제를 논의했 고, 7월에는 임시국회에서 김근태 부총재가 대신 읽은 대표연설을 통해 사면문제를 공식 거론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사과와 반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8월 광복절을 앞두고 더이상 사과를 기다리지 않고 사면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직접 뛰었다는 흔적을 남겼다. 당시 국민회의 광주시지부장인 박광태 의원이 광주지역 5·18단체 관계자 들과 만나 화해 분위기를 유도했다. 당시 국민회의는 “이들 단체의 자발 적인 움직임”이라며 이런 사실을 애써 부인했다.

하지만 이제 국민회의는 더이상 사면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 는다. 오히려 홍보에 나섰다. 박지원 총재 특보는 “아직도 김 총재가 집 권하면 정치보복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며 “전·노씨 사면에 대한 입장 변화는 이를 불식시키고 대화합의 인상을 심는 계기가 될 것” 이라고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장성민 부대변인은 아예 한발 더 나갔다. “전·노씨 사면은 여권의 프레미엄”이라며 “김 총재가 이를 먼저 공론 화함으로써 여권의 프리미엄을 박탈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김 총재의 적극적인 태도가 신한국당이 사면문제를 국면전환용 카드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정치전술이라는 논리를 편 것이다. 신한국당도 물론 사면의 주도권을 국민회의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적극적 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이회창 대표는 지난 7월29일까지도 사면에 대해 ‘신중론’을 펼쳤다. 한국방송공사 토론회에 참석해 “(사면)방법과 시 기 등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사실 대구·경북 세 력을 끌어안고 정국을 돌파할 수 있는 와일드 카드로 전·노 사면이 필요 하다는 측근들의 주장이 계속됐지만 섣불리 나섰다가 오히려 시민·사회 단체의 반발만 사게 되리라는 우려 때문에 확실한 입장표명을 유보해 왔 다. 하지만 김 총재가 먼저 ‘용서론’을 주장하면서 이 대표가 비난여론 을 뒤집어쓸 우려가 불식되자 전·노 사면 카드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30일과 31일 잇따라 회의를 열고 31일 밤늦게 이 대표가 두 전직 대통령의 추석 전 석방을 전격적으로 건의하기로 한 것이다.


이회창 대표, 범 여권 결집 강화의 호재

이 대표쪽의 계산은 더욱 복잡하다. 먼저 전·노 사면을 적극적으로 주도 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연말 대선의 최대 변수인 대구·경북의 민심을 돌리고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끊임없이 요구해온 불교계의 표심도 얻 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더욱이 9월 안에 떨어진 지지도를 반전시키지 못할 경우 낙마할 수도 있 다는 절박감에 시달려온 이 대표로서는 김 총재가 빗장을 열어준 사면문 제를 국면전환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 대표의 한 측근은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은 분열된 여권을 단합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어떻게 하는 것이 내부 통합을 극대화하면서 김 총재와 차별화를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단지 사면에 머무르지 않고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을 잇따라 내놓 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대표쪽에서 이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노 사면 논란이 이 대표 중심의 여권 재결집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는 전망 때문이 다. 이 대표가 이번 전·노 사면 추진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범여권의 보수 표를 끌어안는 데 성공한다면 지지세 반전의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독 자출마 움직임을 보이는 이인제 경기지사 등의 움직임도 봉쇄할 수 있으 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여권에서는 이번 사면이 이 대표 중심 보수대연합의 계기가 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치고 있다. 여권의 관계자들은 그동안 야권 중심의 보수대연 합만이 제기됐지만 전·노 사면을 통해 보수표 결집에 성공할 경우 이 대 표를 주축으로 한 보수대연합이 구체화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김 총재와 이 대표의 이런 계산이 어느 정도 실현될지는 아직 점 치기 어렵다. 전·노 사면을 바라보는 각 정치세력의 이견이 남아 있는 데다 사면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반발 등 걸림돌 또한 크기 때문이다.

우선 이 대표에 반대하는 신한국당 안 민주계 세력 일부와 호남 출신 인 사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재오 의원은 “정략적 승부차원 에서 당이 뭔가를 내놓아서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비난했고 민주계 출신 인사들 몇몇은 “이번 조치로 아들 병역제로 실망한 젊은 유 권자들의 표를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냐”고 말했다.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김 총재가 사면문제를 거론해놓고 이 대표에게 주도 권을 빼앗겼고 득표에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이 고개를 들 고 있다. 여기에 김홍신 이부영 이미경 의원 등도 “사면은 역사적 죄악 행위”라며 반발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대 변수는 시민 사회단체의 움직임이다. 정치권의 사면 생색내기 다툼 이 한창인 1일 시민·사회단체는 일제히 반발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나섰 다.

참여연대는 “당사자들이 반성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시점에서 용서와 화 해 운운하며 사면을 거론하는 것은 사법정의를 유린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얄팍한 정치논리”이라며 “사면을 보수세력과 영남지역의 득표전략으로 활용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천주교 정 의구현사제단은 “국민과 더불어 엄청난 모독감을 느낀다”며 “사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대선후보들에 대해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적 명 예와 정의감으로 반대하고 낙선운동에 나서겠다”고 엄중 경고했다. “5 ·6공 치하에서 고통받고 구속 수감중인 양심수들에 대한 우선적 석방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도움 안되다는 것 보여 줄터” 반발도 거세

광주 5·18단체들도 들끓고 있다. 5·18 광주민중항쟁유족회는 “사면이 논의되더라도 진정한 참회를 전제로 가능한 일”이라며 “피해 당사자들 의 의견을 무시한 사면에 반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18학살자 재판 을 위한 광주·전남지역 공동대책위원회는 신한국당은 물론 사면의 빗장 을 열어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 대한 항의 방문과 시위도 계획하고 있 다. 공대위 박강배 총무는 “사면론자들에 대한 낙선운동까지 요구하고 있다”며 “사면 주장이 대선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겠 다”고 말했다.

민가협,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도 정치권의 사면시도를 무력화하기 위한 조직적인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침묵하던 교수 등 지식인 사회의 체계적인 반발도 모색되고 있다.

연말 대선을 의식한 국민회의와 신한국당의 표계산으로 촉발된 전·노 사 면 경쟁이 득표에 정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아니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