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이회창 “나도 깜짝쇼할래”

(사진/강삼재 사무총장과 당 업무를 논의하는 이 대표. `전·노 사면 건의'를 계기로 이제 옛 여권 세력과 보수층에 기대 선거를 치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난 8월28일 실시된 지방 6개 언론사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는 이회창 신 한국당 대표 진영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대표는 이인제 경기지사의 출마를 전제로 한 5자 대결 구도에서 이인 제(31.7%)-김대중(25.2%)-조순(16.5%)에 이어 15.2%의 지지율로 4위였다. 5위는 7.9%의 지지를 얻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였다.


‘대통합 정치’ 철저한 언론플레이

4위로 떨어진 것도 그렇지만, 지지율이 이인제 경기지사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 이 대표쪽은 경악했다. 이 대표 진영의 한 인사는 이런 결과 를 보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천주교 신 자인 이 대표는 요즘 기도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병역 공방 이후 계속 추락하는 이회창 대표에게 활로는 없는 것일까. 그 의 측근들은 “아직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여지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한 측근은 “이 대표 스스로도 몇가지 방안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대표는 이미 카드 2개를 던졌다. 이른바 ‘대통 합 정치’ 구상과 ‘전두환·노태우 사면’이다.

이 대표는 지난 8월28일 천안 중앙연수원에서 열린 전국 시·도의원 특강 에서 “계파와 정파를 떠나서 우리당이 앞장서 국민회의와 국민통합추진 회의(통추), 자민련, 민주당 할 것 없이 모든 정파에서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통합의 정치를 열겠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 대표의 이런 발언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주례보고 직후에 나왔다. 이 때문 에 청와대와 교감하여 이 대표가 대통합 정치 구상을 밝힌 게 아니냐는 추측이 적지 않다. 청와대쪽에선 이런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이 대표의 한 측근은 “김 대통령과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는 ‘대통합 정치’를 추진하는 데 청와대가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 라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대통합 정치’ 구상이 어떤 밑그림이나 시나리오 위에서 나온 발 언이 아님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 로 요동칠 대선 정국에서 어떤 가능성도 열어놓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 대표의 ‘대통합 정치’ 구상이 즉흥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충분한 밑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준비를 한 흔적은 역력 하다. 이 대표는 천안 중앙연수원 방문 당시 취재진이 한명도 동행하지 않자, 부대변인을 통해 자신의 발언을 서울의 신한국당 기자실로 즉시 알 리라고 지시했다. 철저하게 언론을 의식해 발언했던 92년의 김영삼 민자 당 후보와는 달리, 언론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이 대표의 평소 태도로 볼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문수 의원은 “최근 이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다른 정파 의 사람들도 포용하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그때 이 대표는 가타부타 말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고 말했다. 김 의원 외에도 몇몇 인사들이 이 대표에게 이런 건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좀 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 대표 성격 때문에 이 대표가 천안에서 ‘ 대통합’ 발언을 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허주가 박태준 영입 나설까

‘대통합 정치’의 1차 목표는 야권 및 시민운동권 인사들의 영입이다. 야권은 주로 국민통합추진회의와 민주당 및 자민련 일부가 타깃이 될 것 같다. 통추와 민주당의 개혁 성향 의원들은 김문수 의원 등 신한국당 내 개혁 성향 초선 의원들이 자주 접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초선의원은 “원래 친하기 때문에 통추·민주당 의원들과 자주 만난다. 또 ‘이 대표 를 도와달라’는 얘기도 하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까지나 일반적인 얘기일 뿐 영입 교섭 차원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 다. 자민련 의원들은 신경식, 백남치, 유흥수 의원 등이 만나고 있지만, 이것 역시 당 지도부의 영입 교섭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이 런 현재 상황은 ‘대통합 정치’의 진전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8월31일 귀국한 박태준 의원의 영입엔 김윤환 고문이 나설 가능성이 높다 . 김 고문은 박 의원에 대해 “그의 정치적 뿌리가 민정계인데 신한국당 에 못올 이유가 어디 있느냐”며 그의 영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식으로 ‘이회창 정치’를 밀고나감으로써 이인제 지사의 독자출마 움직임이나 민주계 일각의 후보 교체론을 잠재운다는 계 획이다.

이 대표가 8월31일 전격적으로 ‘전두환·노태우 사면 건의’라는 카드를 꺼낸 것도 ‘대통합 구상’과 연관이 있다. 전·노씨 사면 건의는 물론 범여권 결속과 영남 및 보수 계층 표를 겨냥한 행동이다. 그러나 한편으 로는 정치판의 구도를 뒤흔듦으로써 국면 전환의 효과와 함께 현재의 위 기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자는 뜻도 있다.

전·노씨의 사면은 12월 대선을 앞두고 기존 정치구도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전·노씨는 출감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옛 여권의 또다른 구심이 될 수 있다. 이는 정치권의 유동성을 높이며 정파간 합종 연횡의 가능성을 훨씬 다양하게 만드는 구실을 할 것이다. 당장 국민회의 와 자민련간의 DJP 연대 협상에도 영향을 주고, 경북지역 자민련 의원들 의 동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위기상황에 몰린 이 대표로 선 이처럼 정치판의 유동성을 높이는 게 연대 추진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 .

이 대표는 ‘전·노 사면 건의’를 계기로 확실하게 대선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제 옛 여권 세력과 보수층에 기대 선거를 치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개혁과 참신성’이라는 대중적 이미지와 정치권의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 해왔다. 이 대표가 지난 3월 신한국당 대표가 된 뒤 그의 태도에 대해 당 밖에선 “참신성이 퇴색했다”고 비판했고, 당내에선 “아직 아마추어 티 를 벗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그가 대표라는 직을 갖고도 당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계속 흔들린 데는, 기존 정치 행태에 쉽게 적응하지 못 한 측면도 크게 작용했다.


“깜짝 카드 몇개 더 있다”

이 대표는 이런 딜레마 속에서, 자신의 대중적 인기에 여권의 프리미엄을 얹는 방식의 선거전략을 추구해왔다. 두 사안은 기본적으로 서로 화합하 기 힘든 것이었지만, 7월21일 전당대회 직후 지지율이 40%를 웃돌 때까지 만 해도 이런 전략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병역 공방으로 개혁 적이고 참신한 이미지가 큰 타격을 입고 이를 만회하기가 쉽지 않게 되자 , ‘개혁’ 이미지 복원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예전의 여당 후보들처럼 확 실하게 ‘보수’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바둑으로 치면, 확실한 불계 승을 노리다 이게 어려워지자 좀 불안하긴 하지만 계가바둑으로 결정한 것과 같다. ‘여당 후보’는 지지율의 급등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일정 정도의 지지율은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대표의 ‘보수 드라이브’는 앞으로 정책 분야에서도 가시화할 전망이 다. 이 대표 비서실은 이미 정책분야에서 10개의 이슈를 정해, 현정권과 차별화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첫번째 카드가 지난 8월 기아 사태에 대한 정부의 적극 개입과 3자 인수 반대라는 입장 표명이었다. 이 대표쪽 은 기아 외에도 △금융실명제 △경부고속철 △금융개혁 △사교육비 문제 등에서 계속 현정권과 차별화되는 내용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생각이다.이 대표쪽이 정책 대안을 준비한 애초 의도는 현정권과 차별화되는 이 대표 만의 특성을 부각시킨다는 뜻이었으나, 상황이 변함에 따라 대안의 방향 도 보수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 가령 금융실명제의 경우, 부분적 보 완뿐 아니라 전면적인 재검토도 내부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조만간 이런 내용의 경제현안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기자회견 형식 으로 발표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중이다.

이 대표 진영에선 “전·노 사면 외에도 몇개의 카드를 더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한 측근인사는 “지금의 상황을 돌파하려면 정국 흐름을 바꿀 만 한 내용이 아니면 안 된다”며 “집권 후 개헌 가능성까지 모든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카드는 이인제 경기지사의 탈당 이 후에나 쓸 수 있는 것들이다. 효과가 큰만큼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 기 때문이다. 보수 색채를 분명히 하면서 ‘깜짝 카드’로 위기 탈출을 노리는 이 대표의 전략이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 주목된다.

박찬수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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