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복합 불황' 현실화되는가

(사진/직장인들의 얇아진 주머니로 식당가도 썰렁하다. 2/4분기중 도시근로자 가계의 월평균 소비지출 증가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1/3도 안된다.)

우리 경제가 지표상으로 보면 오랜 침체국면에서 벗어나 회복국면으로 진 입하기 위해 기지개를 펴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2/4분기 우리 경제는 수출 회복세에 힘입어 총체적인 경제활동을 보 여주는 지표인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6.3%의 실질 성장률을 기록했다 . 이는 올 1/4분기 성장률 5.5%보다 0.8%포인트 높은 것이다. 상반기 전 체 성장률도 5.9%로 각종 경제연구소들이 예상했던 4%대보다 훨씬 양호하 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도 올해 한국경제가 GDP 기준으로 6.5%의 성 장률을 기록해 지난 5월의 전망치 5.7%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


수출물량 늘어도 단가는 떨어지니…

7월중 산업생산도 지난해 동기 대비 7.9% 증가했다. 지난 6월의 12.4% 증 가율에 비하면 낮지만, 비교시점인 지난해 6월의 증가율 3.7%와 7월의 8. 2%를 감안하면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게 통계청의 설명이다. 통계 청은 향후 6∼7개월 뒤의 경기상황을 예고하는 선행종합지수가 지난 3월 이후 7월까지 5개월 연속 상승세를 타고 있음을 들어 9월 또는 10월중에 는 경기가 저점을 통과해 회복세로 돌아설 것으로 내다봤다. 수치상으로 만 보면 일단 연초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진로, 한신공영, 대농으로 이 어진 대기업의 연쇄부도와 기아사태가 생산이나 수출 등 실물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기는 이런 지표상의 추이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는 듯한 기운이 전 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경제의 성적표를 자세히 뜯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호조를 보이는 부문이 제조업, 그 것도 수출이 활발한 중화학공업 등 일부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2/4분 기 중 제조업이 전년 동기대비 7.6% 증가한 반면 농림어업(0.2%), 건설업 (1.1%)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같은 제조업 중에서도 중화학 공업이 11.2% 늘어난 반면 경공업은 생산이 되레 4.8% 감소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졌다. 중화학 중에서도 호조가 두드러진 부문은 전 기전자(18%)와 화학제품(14.6%) 등이다. 생산이 견고한 증가세를 보였다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수출주력업종인 반도체, 석유화학제품 등 일부에 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나마 GDP는 양적 증감만을 따진 것이어서 실제로 기업들의 수입이나 수 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가격조건은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실제로 우리 수출상품의 평균 단가는 지난 95년을 100으로 했을 때 올 6 월엔 75.1로 뚝 떨어졌다. 특히 중화학은 81.3으로 경공업(91.2)에 비해 오히려 가격이 더 떨어졌다. 수출 효자품목으로 불린 반도체의 경우는 더 심해 지난해 6월에는 36.3으로 떨어졌고 올 6월에는 아예 18로 곤두박질 쳤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95년 말까지 개당 40달러를 호가하던 16메가 디램 반도체가 요즘엔 7∼8달러 이하 선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수출 물량이 늘어도 가격이 떨어져 빛좋은 개살구에 그친 셈이다.


주요기업 순이익 27.9%나 감소

성장률 산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투자에도 거품이 숨겨져 있다. 생산된 제품이 팔리지 않고 재고로 쌓이더라도 투자로 잡히는 것이다. 2/4분기 중 고정투자는 0.1%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런 허수를 빼면 실제 감 소폭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다. 7월중 재고증가율이 9.6%로 95년 6월 이후 25개월 만에 처음으로 한자리수로 떨어졌다고 하지만 아직 높은 수 준이다.

실제 주머니 사정과 바로 연결되는 지표들을 살펴보면 썰렁한 체감경기는 더욱 실감이 난다. 증권거래소가 집계한 12월 상장법인 5백81개사의 올 상반기 영업실적에 따르면 매출액은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14% 늘어나는 데 그쳐 90년대 들어 93년에 이어 두번째로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순이 익은 한술 더 떠 무려 27.9%나 감소했다. 수출물량은 늘었어도 단가가 떨 어져 채산성이 떨어진 것과 맥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기업이 어려우면 직원들이 주머니가 얇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2/4분기중 도시근로자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2백21만1천9백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2/4분기의 증가율 13 .3%에 비하면 크게 둔화된 것이다. 수입이 예상보다 줄고 기업들의 감원 사태로 앞날에 대한 전망마저 불투명할 때 가계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 는 일은 돈 씀씀이를 줄이는 것이다. 2/4분기중 도시근로자 가계의 월평 균 소비지출은 4.5% 증가에 그쳐 지난해 같은 기간의 17.2%를 크게 밑돈 것은 물론 통계청이 집계를 시작한 지난 63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2/4분기중 민간과 정부 모두의 최종 소비지출도 전년 동기 대 비 5% 늘어나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지난해만 해도 소비지출 증가율은 7 %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추세는 7월에도 이어져 도소매판매 증가 율이 4.9%에 그쳤다. 그나마 기아자동차의 할인판매로 인한 증가분 1.4% 포인트를 제외하면 2/4분기의 4.1%보다 더욱 낮아진 것이다. 설비투자도 국내기계 수주가 5.4% 증가해 다소 회복기미를 보였지만 기계류수입액이 20%나 감소해 여전히 침체상태가 계속됐다. 내수의 두 축인 소비와 투자 가 아직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이다. 내수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체 감경기가 최악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아그룹 처리’가 열쇠

금융시장 및 외환시장 불안도 체감경기를 더욱 나쁘게 하는 요인이다. 대 기업들의 연쇄부도로 금융기관들에 부실채권이 쌓이게 되면 기업이나 가 계에 대한 대출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아사태 이후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은행 등 금융기관들의 대출 기피는 기업들에 흑자부도의 공 포감을 안겨주고 있다. 진성어음조차 할인을 못받아 부도사태를 맞고 있 는 기아그룹 협력업체들이 대표적 사례다.

부도율도 4월의 0.25%를 고비로 다소 주춤하는 듯싶더니 7월에는 다시 기 아사태의 영향으로 0.24%(금액 기준)로 높아졌다. 지난해 전체 어음부도 율 0.14%와 비교하면 두배에 가까운 수치다. 부도업체수도 지난해 상반기 에는 월평균 9백19개에 그쳤으나 올 상반기에는 1천2백3개로 늘더니 7월 들어서는 1천3백84개로 더욱 많아졌다.

금융시장 불안이 실물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아직은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장기화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조심스럽지만 복합불황에 대한 우려감까지 제 기되고 있다. 복합불황이란 일본의 예처럼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부동 산 가격과 주가의 폭락→이를 담보로 대출해 준 금융기관들의 부실→대출 기피→기업들의 흑자도산이라는 최악의 상황이다. 박영철 금융연구원장은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금융기관 부실채권이 계속 늘어나면 금융불안이 증폭돼 복합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현재의 금융불 안이 단기간에 해소될 것으로 낙관하는 시각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 큼 전망이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최대의 관건은 기아그룹의 처리다. 정부가 지난 8월26일 제일은행과 종합금융사 대한 한은 특융 등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29일 종목 당 외국인투자한도 확대 등 증시부양책을 잇따라 내놓았음에도 금융시장 의 반응이 시큰둥한 것은 근본 원인인 기아사태에 대한 처방이 빠졌기 때 문이다. 기아사태가 지금처럼 정부와 기아와의 팽팽한 대립을 해결하지 못하고 끝내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복합불황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금융전문가들은 그 분기점을 기아의 부도유예협약 적용이 끝나는 9 월29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이 우리 경제의 회복기미를 알리는 각종 통 계수치를 반가운 눈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요인도 이런 불확실성 때문이 다. 한국은행의 이상헌 조사1부장은 “우리 경제가 좋아지는 쪽으로 움직 이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 속도가 완만하고 중장기 전망이 불확실해 본격적인 회복기 진입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 “경기가 횡보 하고 있다는 표현 이외에는 적절한 말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