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불황, 질흑같은 터널 속

(사진/남산 공원벤치에 드러누운 실업자. 올해 기업의 부도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55만여명이다.)

그해 초가을 거리엔 온통 ‘걱정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제 15 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던 1997년, 한가위를 보름 앞둔 8월 말의 거 리풍경을 사람들은 훗날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장사하기 정말 힘들다”

8월28일 오후 8시, 서울 명동거리. 만국기가 내걸린 하늘위로 ‘명동 패 션페스티벌 8.29∼9.13’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바람에 출렁거리고, 거 리의 레코드 가게에선 앳된 목소리의 여가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부르는 “한번만 안아주세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발길이 벌써 뜨악해지기 시작했고 거리는 이미 활기를 잃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 이 거리에 버려진 광고지들을 아무렇게나 휩쓸어가고, 길모퉁이 유명브랜 드를 파는 옷가게들은 벌써 하나둘씩 철시를 서두르고 있었다. ‘30% 세 일’이라고 유리창에 써붙인 신발가게 앞에서 어린아이는 무엇 때문인지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쓰고 있었고, 아이의 저만치 앞에 엄마는 무표정 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외식업체 ‘TGI 프라이데이’는 ‘잭다니엘과 함께 하는 특별사은행사’ 라는 이름으로 “8월1일부터 9월 말까지 잭다니엘 메뉴나 음료를 마시는 사람에게 회수에 따라 50% 할인권이나 크리스탈 글라스를 나눠준다”는 광고를 내붙였다. “손님이 크게 줄자, 새 메뉴를 선보이면서 시작한 판 촉전략”이라고 여직원이 귀띔한다. 옷가게 ‘오프리미츠’는 창사 29주 년을 기념해, ‘V-익스체인지’는 부산점 오픈을 기념해 각각 사은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사은행사와 세일을 위해서는 무슨 핑계를 대든 그것은 중 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눈물의 부도, 가게정리 2천원’표 넥타이도 사 는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몇몇 작은 옷가게엔 가을 신상품에 대 해서도 세일을 시작한다는 알림이 나붙어 있었다.

‘명동의류특설매장’ 관리직원 최인철(24)씨는 장사가 어떠냐는 물음에 “휴가철 이후 매출이 절반 정도로 뚝 떨어졌다. 아무리 환절기라고는 해 도 너무 심하다”고 손을 휘휘 내젓는다. 명동거리의 노점에서 1년째 옷 을 팔고 있다는 김성민(28)씨는 “작년에 비해 (매출이)20% 정도에 불과 하다”며 “옷을 고르는 사람들도 너무 까다로워 미치겠다”고 하소연한 다.

오후 10시30분, 1만2천여개의 각종 점포가 밀집해 있는 남대문시장. 도매 를 위주로 하는 대형의류상가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소매를 중심으 로 하는 가게 주인들만이 의자를 길가로 내놓고 앉아 답답한듯 부채질을 해대고 있다. 부르뎅아동복 상가 옆 옷가게를 지키고 있던 정씨라고 밝힌 한 상인은 “요즘은 ‘개시했느냐?’는 물음이 만나면 하는 인사다. 하루 2만∼3만원 팔아 그날 밥먹으면 땡이다”고 말하고는 더 말한들 무슨 소 용이 있느냐는 듯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과외 아르바이트도 하늘의 별따기

남대문시장을 찾는 지방 도소매상들의 발길도 눈에 띄게 줄었다. 남대문 시장 관리사무실의 한 직원은 “요즘에도 하루에 60여대씩 지방에서 버스 가 올라오긴 하지만 예전처럼 사람이 채워오지 못하는 데다가 사가는 물 량도 크게 줄었다”고 말한다. 부르뎅아동복 상가는 자구책으로 쌍용의 ‘코란도 밴’ 1대와 휴대폰 30대를 경품으로 내걸고 손님유치에 나섰다. 포키아동복 상가도 1백만원 이상 구입고객에게 5만원권 상품권을 주고, 추첨을 통해 아반떼 승용차 1대를 주기로 했다. 그럼에도 남대문시장은 이틀 뒤인 30일, 시장이 문을 닫는 토요일을 맞아 새벽에 잠시 북적댔을 뿐, 활기를 찾지 못했다.

28일 자정, 남대문을 제치고 새로운 중심상권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대문 시장. 디자이너클럽과 팀204 앞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버스에서 내리 는 사람들과, 산 물건들을 챙겨 나오는 사람들이 엉켜 혼잡하다. 활기찬 시장의 냄새가 물씬 난다. 그러나 상인들의 얘기는 불경기를 다시 실감케 한다. 대구 중앙쇼핑 직원이라고 밝힌 김세영(20)씨는 “예전에는 하루에 8대에서 많으면 12대까지 올라 왔는데 요즘엔 5∼6대만 올라온다”며 “ 대구에서도 장사가 안 돼 아예 가게를 팔아넘기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다.

장사가 그래도 제법 잘된다는 디자이너클럽도 고객들에게 TV 2천대 등 경 품을 내걸었다. 물론 입주상인들의 부담이다. 5층 남성복 상가의 한 점포 주인은 “가게마다 15만원어치씩 사은권을 할당받아 고객들에게 나눠주고 있다”면서 “그런다고 해서 손님이 더 오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시무 룩하다. 그는 매출사정이 어떠냐는 물음에 “요즘들어 현금이 더 돌지 않 아 걱정이다”는 한마디로 대답을 그쳤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비닐봉투 한두개씩을 든 사람들이 양쪽에서 50여 명갸량씩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다. 심야 알뜰쇼핑족이다. 더위도 식 히고 값도 싸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시장으로 모여들고 있었 다. 대학 3학년이라는 이영미(22·여·서울 성수동)씨는 “요즘 과외 아 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옷값이 내리긴 했지만, 용돈 이 빠듯해 긴축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말한다. 심야쇼핑족 가운데는 남 자들도 간혹 끼어있다.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29일 새벽 1시, 동대문 신평화상가. 손님의 수가 근처 디자이너클럽만 훨 씬 못하다. 20년 동안 옷만 팔아왔다는 ‘진스타’의 주인 박태선(53)씨 는 “안 팔리는 것도 걱정이지만 여름 상품이 매주 몇백만원어치씩 계속 반품되는 것이 더 답답하다. 그게 다 안 팔렸다는 것 아니냐”며 담배부 터 피워문다. 그는 “안산에서 오던 한 단골소매상은 2년 전만 해도 일주 일에 두세번은 오더니, 요즘엔 보름이나 20일에 한번밖에 안온다. 어차피 시장물건이야 서민들이 사는 건데, 공단에 몇달치 월급 못받는 사람이 많 다는데 장사가 되겠어?”라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품었다.

백화점도 활기를 잃은지 이미 오래다. 해마다 30% 가까운 매출신장을 기 록했던 롯데백화점 본점 직원들은 요즘 하루매출이 거의 지난해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울상이다. 9월 첫째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추 석대목도 예년에 비해 훨씬 못하리라고 백화점쪽은 일찌감치 체념하고 있 다.

강남 아크리스백화점쪽도 “식료품 매출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의류를 비롯해 고가품에 대한 수요가 급감해 전반적으로 매출신장이 거의 이뤄지 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홍보담당 박대홍(32)씨는 “기업들이 단체주문 하는 추석선물도 가격대를 5만∼10만원대에서 3만~5만원대로 낮추거나, 아예 선물을 하지 않는 경우가 크게 늘어, 올해는 지난해의 매출액 30억 원보다 크게 낮춰 20억원을 목표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더욱 불안한 것은 월급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남산순환도로 근처에 서 만난 이아무개(38)씨는 중고 승용차 한대가 그의 집이라고 했다. 전문 대를 졸업한 뒤 광고영업사원으로 일하다 영자신문을 만들 계획이라던 ㅅ 사에 스카우트된 이씨는 3개월 만에 회사가 신문 창간계획을 철회하면서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이씨는 ㅎ사의 도급제 광고영업사원으로 다시 취직 했지만, 빚만 지고 끝내는 집까지 날렸다. 형제들 돈까지 끌어다 쓴 이씨 는 결국 부인과도 이혼하고, 지금은 아는 사람조차 피해 그렇게 숨어산다 고 털어놓는다.

성남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석달치 임금을 받지 못한 채 두달 전 실업자가 된 김중기(33·성남시 은행동)씨는 막노 동이라도 해보려고 나섰지만 일거리를 얻는 날은 한달에 열흘을 넘지 못 한다고 말한다. “퇴직금 우선변제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 로 김씨는 혹시 퇴직금이라도 챙길 수 있을까 하던 마지막 기대조차 이제 버렸다. 김씨처럼 기업의 부도로 올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전국에 55만 여명이나 된다. 안산 시화공단 관리사무소의 한 직원은 “오직 떠나는 사 람만이 있을 뿐 돌아와도 받아들일 곳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못 받은 월급, 무려 4천억원

잇따른 기업의 부도는 가내수공업으로 연명하던 끄트머리 하청업자의 가 족까지도 파괴해놓았다. 성아무개(61·부산시 가야동)씨는 아들과 직원 2 명을 데리고 가구제조업체에 문짝용 자석잠금쇠를 생산해 납품하는 일로 평생을 일했다고 한다. 그는 올해초 납품하던 회사의 부도로 8천만원을 물렸고, 최근에는 또다른 가구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1억5천만원을 날렸 다. 평생을 모아 산 단독주택을 팔기로 했지만, 성씨는 앞으로 살아갈 길 이 막연하기만 하다. 성씨의 아들은 요즘도 술로 날을 보낸다.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지만, 이들이라고 해서 고 민이 없을 리 없다. 회사가 부도났거나 회사경영이 어려워져 노동자들이 받지 못하고 있는 임금은 모두 4천억원이다. 예년처럼 추석상여금을 받지 못하게 된 노동자들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29일 회원사들을 상대로 자금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첫날 설문에 응한 기업 20개 업체 중 절반은 올 추석상여금을 지급할 수 없거나 줄일 계획 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우울한 사람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서울 제기동에서 작은 가방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윤아무개(48)씨는 “공장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종업원들에게 추석상여금을 주지 못할 것 같다”면서 고개를 떨궜다. 더 이상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고향에서 올라오는 돈이 갈수 록 줄어들어요.” 전남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는 박아무개( 26)씨도 이 불황이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30일 오전 다시 명동거리. 명동패션 페스티벌을 찾은 사람들로 거리는 분 주하고, 요란한 음악이 아무일 없다는 듯 흥을 돋운다. 그러나 이미 여유 를 잃은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은 “과연 희망을 가져도 좋을지”하는 걱정으로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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