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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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존스. 챙달린 모자에 사파리를 입고 허리춤엔 채찍을 차고 성서 의 비밀을 쫓는 할리우드의 모험왕이다. 윤철중(62·상명대)교수를 그렇 게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몇천년 전 하늘과 땅과 사람의 비밀이 깃든 신 화의 흔적을 찾아 무시로 여행을 떠나니. 그 길에서 아찔한 모험을 만나 고 예기치 못한 고초를 겪기도 한다. 그때 행장이란 게 초라하기 짝이 없 다. 낡은 <삼국유사> 사본 한권과 꼬깃꼬깃한 지도 한장과 카메라 두어개 . 하긴 단군을 찾아 혁거세를 찾아 탈해를 찾아 떠나는 길에 더이상 무엇 이 필요하랴.
학문의 길 뒷골목에 숨어있던 ‘신화’
신화는 덫이었다. 학문의 길 후미진 곳에 숨어 있다 30년 인생을 나꿔챘 다. 국문학을 전공한답시고 향가에 마음을 쏟은 게 낼름 미끼를 삼킨 꼴 이 됐다. 향가를 풀다보니 자욱한 안개가 발목을 잡았다. 이제껏 향가의 미로를 안내해온 불교라는 지팡이로는 한걸음도 더 나갈 수 없었다. 향가 에는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선인들의 정체모를 기억이 녹아 있었다. 불교의 껍질을 벗기면 그 기억의 조각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삼국 유사> 기이편에 실린 신화들이 그 열쇠였다.
먼저 탈해를 찾아나섰다. 용성국(龍城國)의 왕자로 가락국(駕洛國)을 거 쳐 계림(鷄林)의 동쪽 바닷가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는 신라 4대 임금. 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아진포는 어디일까. 역사학자도 아니고 고고 학자도 아닌 그로선 일단 자료를 섭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른바 대가라는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혼란스럽 기만 했다. 아진포만 해도 누구는 지금의 영일(迎日)이라 하고, 누구는 감포(甘浦)라 했다. 한 일본학자는 하서리(下西里)라는 마을이라고 했다. 조선조에 나온 읍지(邑誌)를 훑고 지도를 뒤져도 아진포는 몽롱했다. 김 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아예 이름조차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길이 직접 찾아가보는 거였다. 학자들이 거명한 영일과 감포 , 하서리 일대를 무턱대고 헤맸다.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기약없는 유 랑이었다. 버스도 닿지 않는 길을 걸어 전설의 고향을 더듬어나갔다. 그 러다 행운을 만났다. 하서리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나아리(羅 兒里)란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삼국유사> 혁거세 신화에 내 아(乃兒)라는 지명이 나온 터라 귀가 솔깃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아리 주민들은 마을의 옛이름이 아진포였다고 기억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삼 국유사>에는 언급도 안 된 새로운 이야기까지 들려주는 거였다. 마을 앞 갯가에 ‘홈바위‘라는 돌섬이 있고, 탈해가 그 바위로 올랐다는. 그는 만세를 부르고 말았다.
(사진/신화의 흔적을 좇아 30년 외길을 걸었다. 향가의 정체모를 표현. 역사적의 몇글자가 유일한 나침반이었다. )
그때부터 그의 험난한 신화찾기 여행이 시작됐다. 나아리에서 돌아오자마 자 포니 자동차를 샀다. 신화가 깃든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눈으로 확 인할 생각이었다. 향가의 정체모를 표현, 역사책에 실린 글자 몇개가 유 일한 나침반이었다. 그 나침반이란 게 그를 고생길로만 이끌었다. 바닷가 를 돌며 사진을 찍다 간첩으로 몰려 봉변을 당하기도 했고, 투기꾼으로 몰려 눈총을 받기도 했다. 자갈길을 달리다 기름통이 깨져 차 밑에 기어 들어가 껌으로 땜빵하는 곤욕도 치렀다. 신화의 현장들은 지도에서도 사 라지고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 들을 카메라에 담고 일일이 기록을 남겼다. 온 산을 이잡듯이 뒤지고도 허탕을 쳤을 땐 돌아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몇천년 전 신화의 흔적들이 온전할 리 없다. 국토를 휩쓴 개발 바람에 신화를 간직한 유적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 었다. ‘홈바위’만 해도 이제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근처에 원자력발전소 가 들어서면서 방파제를 쌓는 바람에 토사가 밀려와 바위섬을 삼켜버렸다 . 태풍 사라가 몰아쳤을 때 잠시 본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처용의 신화 가 깃든 ‘처용암’은 근처에 온산공단이 생기면서 날로 황폐해지고 있다 . 나루터가 있고 마을이 있던 한적한 풍경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혁거 세의 신화가 숨쉬는 샘 ‘동천’은 아예 콘크리트로 메워졌다. 알에서 나 온 혁거세를 목욕시켰다는 이 샘은 흔적조차 없고, 고목 한그루만이 위치 를 기억케 한다. 이런 신화의 자리들은 이제 그의 사진첩에 남아 있을 뿐 이다. 필름 아낀답시고 많이 찍어두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술독에 흘려 보낸 청춘
학자로서 그는 이만저만한 늦깎이가 아니다. 처음엔 의대를 진학했다. 해 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힘든 시절을 보내다 보니 먹고 살 방편이 급했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 끼니도 거르는 판에 제때 등록금을 댈 수가 없었 다. 실험실서 교수를 도와주며 근근히 생활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결국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그게 너무 분해 등록금을 구해 4년 동안 봄 마다 학교를 찾아가 떼를 썼다. “돈 없어 잘렸는데 돈 가져왔으니 받아 줘야 하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새 20대 청춘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할 수없이 문과대에 편입한 게 또 실수였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품었던 시인의 꿈을 쫓았지만 허사였다. 이제는 의사가 된 친구들과 어울려 하루 가 멀다하고 술로 밤을 지샜다. 대학원에 들어가 고등학교에 전임 자리를 얻은 뒤론 학업을 완전히 때려치웠다. 월급을 타면 무교동을 휩쓸며 돈 한푼 남지 않을 때까지 술독에 빠져 살았다. 한달 내내 맥주를 먹어도 돈 이 안 떨어지니 신날 수밖에. 결국 대학원에서도 제적. 뒤늦게 등록금 내 고 입학금 내고 해서 석사를 마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30대 늙은 청춘 도 그렇게 지나갔다.
그의 신화찾기 여행은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그는 신화에 민족의 이동경로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탈해와 혁거세, 그리고 단군신화에서 까 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민족의 형성과정을 보는 것이다. 만주벌판을 가로 질러 백두산을 넘어 한반도에 정착한 선인들의 궤적을 신화에서 더듬다보 면 시간의 흐름을 잊기 일쑤다. 그 역동적인 선인들의 삶을 짐작하기도 벅차다. 앞선 문물을 갖고 나타난 이방인들과 그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 물을 창조하는 토착민들의 생동하는 어울림. 그걸 풀어내는 여행길에서 그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옷깃을 여민다.
그는 얼마 전 30년 신화찾기 여행의 열매를 담은 논문집을 냈다. 친구들 한테 책 나왔다고 하니 “남들 안 하는 것 하느라 고생했다”며 웃더란다 . 사실 신화라는 게 학계에선 인기없는 품목이다. 돈도 안 되고 관심도 끌지 못한다. 그때 이렇게 자위했다. “남들 안 하는 것 하니 속은 편하 다. 남들 다 하는 것 하면 얼마나 말이 많겠느냐. 돈 벌려면 경제학하지 왜 국문학 했겠어. 대학교수해서 밥 굶지는 않으니 내길을 가련다.”
사진 이정용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