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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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몸으로 생각한다> 김용호 지음,민음사 펴냄)
김용호 지음, 민음사 펴냄
현대 사회의 철학적 거대 담론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80 년대 ‘이념’의 자리에 ‘문화’의 논리가 타고앉아 대신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실존적 존재로서의 ‘몸’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 다. 유혹에 약한 살덩이라 경계했던 육체가 실존의 실체로 다가오는 것이 다. 이제 몸은 전위예술 현장의 미학적 주제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가 분 화되고 다양성을 획득할수록 몸은 시대정신과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주요 텍스트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대중사회를 지탱하는 소비와 욕망 등의 뿌 리에 몸이 있는 것이다.
몸을 담론으로 하는 영상화두를 전하는 지은이 김용호씨는 전편인 <와우> 에서 존재의 본질이 의식(정신)이 아니라 몸임을 내세웠다. 그에 따르면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고는 현대사회의 온갖 불행의 씨앗이다. 몸의 가치를 외면한 정신 우월주의는 대립과 갈등 그리고 차별의 이유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에 뿌리 를 둔 이성적 지식은 평면적이고 단선적이었다. 그런 머리 지식의 한계를 넘는 힘이 바로 ‘몸의 사유’이다. 그는 이원성을 대신해 전체성에 주목 한 ‘융합진화’의 논리로 미래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서구인들이 정신의 이성적 성격을 토대로 근대사회를 세웠지만 새로운 미래는 몸의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철학의 출발을 의식이 아닌 몸으로 하는 가운데 창조적인 미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드라마 동원해 몸의 정치 구현
<몸으로 생각한다>에서 지은이는 무려 31편에 이르는 영화와 드라마를 동 원해 독자들을 ‘몸의 정치’로 이끈다. 지은이는 여러 학문의 영역을 자 유자재로 넘나든다. 특정 학문이나 주제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그는 영화를 주목하지만 몰입하지는 않는다. 한걸음 물러서서 재미와 은유를 만끽하면서 몸의 원리에 따른 독 창적인 세계를 구현한다. 영화는 몸의 철학을 설파하는 주요한 도구로 적 당한 위치에 늘어서 있다. 영화는 어쩌면 몸과 몸을 연결하고 인간의 의 식을 해체하는 무기인지 모른다. 몸을 깨우치는 사유의 실험실이 바로 널 리 알려진 영화들이다.
지은이의 화두에 좇아가기 위해서는 영화의 세계에 들어가 몸의 사유를 받아들여야 한다. <후크>는 마음의 족쇄를 깨뜨려 세계와 일체감을 형성 하는 전기를 마련한다. <향수> <마지막 액션 히어로> 등에서는 몸의 감각 을 키워 실존적 존재인 스스로를 깨닫는 기나긴 여정이 <시스터 액트>는 신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이루려는 인간의 몸짓을 통해 개체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몸사람으로서 존재를 확인한 사람들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매달린다. 몸과 커뮤니케이션이 얽혀 변화의 시대를 열어 가는 것이다. <닥터> <로렌조 오일>은 각각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역동적 인 관계를 형성하는 상호작용의 실체가 펼쳐지고 <여명의 눈동자>는 공간 을 둘러싼 새로운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문명의 벽을 뛰어넘는다. <사랑과 영혼> <작은 신의 아이들> 등의 커뮤니케이션 왕국에서는 실체에 얽힌 사 슬을 끊은 기호들이 자유로이 이동·결합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몸의 정치’를 실현하는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샹떼> <긴급명령>을 통해 기존 의 정치가 남긴 허상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데이브> <의뢰인> <볼륨을 높여라>는 집단의식에 가려진 개인을 들여다보는 창구다. 켜켜이 쌓인 두 려움의 껍질을 벗을 사람들은 <꼬마돼지 베이브>를 만나면 새로운 정치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혁명을 경험한다.
이 책의 주제는 몸과 커뮤니케이션, 정치이다. 영화를 모두 보았다 하더 라도 지은이의 관심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몸의 정치’의 진입로에 들어서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지은이는 기 존의 사고방식과 사회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미래사회를 전망하고 새로 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은이는 몸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미래사회를 창조하고 주도한다고 선언한다. 몸이 사고의 중요한 수단이 되면서 머리 사유에 기초해 세운 사회체계가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과학의 성과로 여기는 유전공학·생태학의 비약적인 발달도 그에 따르면 몸이 생기를 얻는 과정 에서 얻은 결실이다. 촉감이나 분위기에 민감한 감성적인 신세대는 몸사 람의 원조격이다. 그들은 순간의 절대성에 의존해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몸에 와닿지 않는 것은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 등의 거대 이념도 그들 앞에서 무기력한 현실이고 보면 지은이의 주장에 고개가 끄 덕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존의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몸의 원 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도는 선명하지 않다. 이런 면에서 미래사회가 또다른 ‘구별짓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일 수도 있다 .
<몸으로 생각한다>는 발상의 대전환을 전제로 현지배체제의 창조적 파괴 를 예고한다. 그 징후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냉전체제의 붕괴에서 비 롯된 이데올로기의 쇠퇴, 정보화 물결, 유통혁명, 국가 관료주의의 위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머리 사람’들의 전유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 던 합리적 이성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현재 진행되는 국가와 기업 등의 변화에 주목하다. 그것은 몸의 부대낌으로 직접적인 의사소통 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 상인 것이다. “몸사람은 나를 중심에 놓고 정책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대의제에 기초한 국가관리 시스템은 수명을 다해가는 것이다. 정치·경제 등의 단위가 생활권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정보기술에 힘입어 지역을 혁신하고 삶의 질을 높여 나가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몸의 시대는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방분권이 실시돼 국가의 간섭없이 정 책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거래를 하는 인터넷 시장이 활발히 개척되고 있으며 대형할인매장은 도·소매상을 시장에서 추방하고 있다. 지은이는 몸과 몸이 맞부딪혀 지정학적인 공간의 벽을 뚫 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계 단일화나 과학발전에 따른 지리적 장벽이 없 어졌다고 해서 공간· 시간의 문제가 완전히 극복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인간이 공간이나 시간에 분리돼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에 대해 지은이는 선진국의 지역혁신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인간과 공 간의 관계가 좁은 울타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지역과 개인이 자체적으 로 세계화를 이룬다면 국가적인 공간개념은 무의미하다. 실리콘밸리가 그 와 같은 유형이다. 국가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이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 고 있다. 수직적으로 움직이는 거대 공간은 외부와의 단절을 초래해 소통 을 배제한다. 네트워크의 수평적 관계를 이루는 게 몸사람들의 활동이다. ”
“공간의 장벽 무너지고 국가도 선택”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새로운 실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지은이 의 판단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유산으로 공간을 획일화하고 문화적 표 준화를 이루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젠 무의미하다. 땅과 땅이 서로 소통하 는 네트워크 체제를 가진 몸사람들은 권력의 분산을 촉진하며 관료주의와 전문주의의 벽을 뚫고 정치·경제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몸사람 들은 스스로가 혁명가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국가체계를 무너뜨리고 생활 권 고유의 물적 기반과 가치를 창조한다. 일상생활을 기반으로 네트워크 공동체를 형성한 몸사람들은 지구적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가운데 국 가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지은이의 인간과 역사 그리고 문명에 대한 일관된 사색의 옳고 그름을 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존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며 현실과 미래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정치’를 촉구 하는 그의 관심사는 정신 우위의 서양철학의 한계에 주목한 재미 정치철 학자 정화열 교수, 몸을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긴 더글러스 러스코프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급격히 부상 하고 있는 ‘몸의 철학’이 우리 곁에 바싹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인은 이미 ‘몸으로 생각하기’에 익숙한 상태인지 모른다.
김수병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