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격동하는 재벌/한라그룹

“중공업 입국! 다시 날자”

(사진/과잉투자 논란도 많았던 한라중공업 삼호조선호. 한라중공업은 올 상반기에만 9억2천만달러어치를 수주했다.)

“앞으로 한달에 2주 이상 한라중공업 삼호조선소를 비롯한 각 계열사 지 방사업장에 상주해 임직원과 숙식을 함께 하며 현장경영을 직접 실천하겠 다.”

한라그룹 정몽원(41) 회장은 지난 2월 이례적으로 ‘전임직원에게 보내는 특별담화문’을 통해 이렇게 밝힌 뒤, 지금까지 그 약속을 계속 지켜오고 있다. 결연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는 게 그룹 관계자들의 얘기다. 하지만 이전부터 그의 소탈함은 그룹 안에서도 종종 화제거리가 된다. 그는 특별 한 공식행사가 없으면 양복보다는 작업복 차림을 즐긴다. 지방사업장에 머무는 동안에는 대부분 20평 남짓한 사원아파트에 묵으면서, 식사도 구 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한다. 직원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며 회사문제를 논의하는 일도 흔하다. 현장 중심으로 문제를 풀면서, 경비절감에도 회장 으로서 모범을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부채율 2065%에도 느긋한 이유

정 회장의 이런 모습은 올 들어 한라그룹이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을 그대 로 반영하고 있다. 지난 1월 말 총수자리를 공식적으로 물려받은 정 회장 에게 “도약을 위해선 우선 그룹의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 가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 재계 순위 12위로 지난해보다 4계단 뛰어오른 한라는, 그러나 재무구조에서 심각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난해 말 기준 자본금 총액 3천57억원에 부채총액 6조2천억원으로 부채율이 무 려 2065%에 달한다. 30대 그룹의 평균 부채율 387%의 6배나 되는 이같은 높은 부채율은 진로(3081%) 다음으로 높은 것이다.

올 들어 계속되는 극심한 불황과 금융시장의 경색은 다른 대기업과 마찬 가지로 한라에게도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한라는 이처럼 높은 부채 율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느긋한 표정이다. 물론 정 명예회장과 형제간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끄는 현대라는 든든한 ‘빽’이 있기 때문 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룹 관계자들도 이를 굳이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 러나 그룹의 한 임원은 “이미 대규모 투자는 모두 끝난 데다 기업의 성 장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데 더 무게를 둔다.

한라중공업을 비롯해 16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한라는 중공업부문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지난 62년 현대양행을 설립해 그룹의 기틀을 세운 정 명예회장은 평소 “중공업 입국”을 역설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는 기계공업 분야가 거의 황무지상태이던 지난 70년대 군포 기계공장을 비롯해 주조공장, 종합기계공장을 잇따라 건설함으로써 우리나라 중공업 분야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또한번의 도약 을 꿈꾸던 한라를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만든 것은 조선업종을 중심 으로 한 대규모 덩치키우기였다.

한라중공업은 전세계 조선업계에 공급과잉 논쟁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영암 삼호조선소를 건설해 지난 95년 6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모두 1 조원의 돈을 쏟아부었다. 이 과정에서만 6천억원 이상의 빚을 졌고, 이로 인한 금융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 지난해 만도기계, 한라공조, 한라시 멘트, 한라콘크리트 등 한라의 4개 상장계열사는 모두 합해 7백39억원의 당기순익을 기록했지만, 그룹 전체로는 당기순익이 2백30억원에 그쳤다. 한라중공업이 나머지 계열사가 벌어들인 돈을 까먹은 셈이다.


한라중공업 수주실적 쾌조

올해 초 완공한 한라펄프제지 신문용지공장(연간 생산능력 25만t) 건설에 도 한라는 그동안 모두 2천5백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국내 신문용지시 장의 포화상태로 큰 재미는 못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다 해외 건설업계의 불황으로 그룹의 주력 가운데 하나인 한라건설이 지난해 해외 에서 입은 손해도 적지 않다. 한라건설은 지난해 해외공사에서 3백12억여 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매출원가가 무려 6백64억원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 다.

그런 까닭에 올해 들어 정몽원 회장의 취임은 애초부터 한라그룹의 급격 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모든 부문에서 그룹 내실을 다지는 실질경영을 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성장위주에 서 성장과 내실을 함께 추구하는 전략으로 키를 돌린 것이다. ‘화려하지 만 속빈 강정’이 아니라, ‘실속있는 이익챙기기’를 위해 한라는 올해 를 ‘기반구축의 해’, 내년을 ‘핵심전략 강화의 해’, 99년을 ‘재도약 의 해’로 하는 3개년 계획을 세웠다. 우선 계열사들이 이익을 낼 수 있 도록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증자를 통해 자기자본을 늘리면서, 한편으로는 부채증가를 억제해 3년 안에 부채비율을 500% 이하로 줄이는 것이 한라그 룹의 목표다.

한라가 이를 위해 올들어 첫번째로 심혈을 기울인 것은 노사관계의 안정 이었다. 회장이 직접 발로 뛰면서 노동자들을 설득한 결과, 한라건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계열사 노조들은 올해 초 일찌감치 임금을 동결하거나 임금인상률을 회사쪽에 위임했다. 물론 회사는 이에 화답하듯 3∼5%의 임 금을 인상했다. 임원들도 임금 10% 반납으로 내핍에 동참했다. 지난 6월 에는 “그룹 역사상 초유의 대량해고”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전체임원의 15%에 해당하는 30여명을 감축하기도 했다. 그룹쪽은 이에 대해 “정체된 조직에 탄력을 부여하고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한라는 또 그룹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계열사를 자동차부품, 시멘트, 중화학공업, 건설·엔지니어링, 유통·서비스군 등 5개의 소그룹 체제로 전환하고, 소그룹별 책임경영을 강화했다. 무역회사인 한라자원과 자동차 부품 유통업체인 마이스터의 구매부문을 통폐합하는 등 조직의 통폐합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불필요한 경비절감 등은 물론 기본적인 사항이다. 정 회장이 지난 6월 부회장 시절부터 그를 곁에서 보좌해온 최측근을 중 심으로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고 친정체제를 확고히 한 것도 이같은 실질 경영을 더욱 강력히 밀고나가겠다는 뜻으로 그룹 안팎에서는 풀이하고 있 다.

다행히 한라그룹은 올해 들어 건실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과잉투자라 는 논란도 많았던 한라중공업 삼호조선소는 올 상반기에만 9억2천만달러 어치를 수주했다. 이미 99년 상반기까지는 일감이 가득 차 있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유조선들의 수명을 20년으로 계산할 때, 현재 가동중인 유 조선 가운데 상당수가 98년부터 2000년 사이에 수명이 다해, 앞으로도 수 주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보통신·금융업에도 손댄다

그룹전체의 상반기 매출신장률도 두드러진다. 한라는 상반기에만 3조1천6 백억원의 매출을 올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32.8%의 신장률을 기록했다. 30대 그룹 가운데 단연 1위다. 특히 건설부문도 지난해 적자를 내던 해외공사가 1/4분기에 모두 끝남에 따라 올해는 지난해보다 20%의 매출신장과 함께, 2백30억원 가량의 경상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최근 신산업경영연구원이 30대 그룹의 수익성과 활동성, 성장성을 평가 한 바에 따르면 한라그룹은 수익성면에서는 선경에 이어 2위, 성장성면에 서는 뉴코아, 신호 등에 이어 5위로 나타나는 등 경영평가에서도 높은 점 수를 받고 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이미 지난해 “오는 2005년까지 국내 10대 그룹에 진 입한 뒤, 사업영역을 확대해 2010년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한다”는 그 룹의 장기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한라는 현재 정 회장이 추진하고 있는 실질경영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현재와 같은 실적을 계속 올릴 경우 이같 은 목표달성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세부적으로는 한라중공업이 21세기 세계 5대 조선 중장비 업체로 부상한다는 목표 아래 영국과 중국 등지에 건설한 현지 중장비공장을 발판으로 글로벌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만도기계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부품 소그룹은 오는 200 0년까지 매출 5조원을 달성해 세계 10대 자동차부품 메이커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또 시멘트소그룹도 2005년까지 매출 1조원을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부가가치가 큰 제품을 개발하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지에 해 외 합작공장도 잇따라 건설하고 있다.

한라그룹은 2세체제를 맞아 그동안의 중공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사업 다 각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 회장은 취임 당시부터 “그룹의 이미지 가 중공업 중심으로 돼 있어 경직된 느낌을 준다”며 “부드러운 사업에 도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21세기 전략산업으로 정보통신과 위성 방송, 금융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한라는 이미 국제통 신사업자로 선정된 온세통신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에 미국 의 A&T사와 공동으로 정보통신 시스템 및 통신망 구축사업을 국내외에서 공동으로 추진키로 했고, 위성방송인 코리아 채널에 중국어 방송의 파트 너사로 참여하기로 신청서를 내놓았다. 한라는 이 밖에도 해외투자를 계 속 확대해 지금까지 그룹 매출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해외 매출을 앞으로 크게 늘려 2005년까지는 전체매출의 30%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그러나 그룹 관계자들은 한라가 이같은 원대한 계획을 목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욱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비만증을 치료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룹 종합기획실 장충구 상무는 “금융시장 의 분위기나 정부의 기업드라이브 정책을 볼 때 구조조정은 오래 끌수록 좋지 않다”며 “아직 최종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계열사의 매각까지를 포 함한 더욱 폭넓은 구조조정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조조정은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얘기다.

애초 한라는 8월초께 부동산의 매각과 수익을 내지 못하는 사업부문의 정 리 등을 포함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갈길 바쁜 한라를 붙잡은 것은 기아사태였다. 국내 최대의 자동차부품 공급업체인 만도기계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한라로서는 기아사태로 인한 협력업 체의 위기를 나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라는 현재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협력업체에 현금결제 등의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 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계획에 없던 출혈이다. 그런데도 기아의 앞길 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는 데 한라의 고민이 있다.

한편으로 정부가 연결제무제표의 작성의무화와 함께, 과다한 차입금에 대 한 규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룹의 한 임 원은 “비만증 환자에게 정부가 무리할 정도의 다이어트를 요구하고 있다 . 그러다가 오히려 탈이 날 수도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나 “어 떻든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데 그룹 관계자들은 인식을 같이하고 있 다. 한라가 어떤 묘수로 기아사태라는 산을 넘고, 구조조정의 파도를 넘 을 지 주목된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11일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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