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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까지 깨버린 포장이사

이사를 마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이래저래 바쁜 일로 미처 정리하지 못한 탓에 방은 어수선했다. 고유형(29)씨는 빗자루를 들었다. 새방답게 예쁘 게 꾸미고 싶었다. 서둘러 짐을 풀고 청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고씨 의 손은 문득 멈췄다. 방바닥엔 모랫가루 같은 돌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 뜯지 못한 채 한쪽 벽에 세워뒀던 졸업작품의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어 냈다. 미술대학 4년을 총결산하는 작품이었다. 4학년이 되면서부터 1년여 에 걸쳐 수없이 고민하며 부수고 다시 유약을 칠하고 가마 앞에서 가슴 조아리며 겨우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제작 기간중 사연도 많아 작품이름을 ‘끝까지 말썽’이라고 붙이긴 했지만 판 매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할 만큼 아꼈던 작품이었다. 두근대던 가슴이 분노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처 포장을 뜯기도 전에 작품 한 귀퉁이는 깨진 몰골을 드러냈다. 이사짐을 안전하게 운반해준다고 해서 값비싼 비용을 마다않고 선택했던 포장이사, 더군다나 짐을 포장할 때 포장하는 방법까지 몇번이나 되풀이 해 일러주지 않았던가. “담요로 먼저 두른 후 박스용지로 포장하면 괜찮 을 거예요.” 포장을 단단히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 에 이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적어도 사과만큼은 받아둬야 이런 실 수가 되풀이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세살 먹은 어린애 같은 사 람에게는 사과할 수 없다. 보상을 하면 되지 않느냐. 보험에 들어 있으니 보험처리 하겠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이삿짐센터 사장의 소리였다. 분노는 폭발했다.

그때부터 고씨의 바쁜 일과에 한 가지 일이 더 추가됐다. 적어도 이 세상 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사장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포장이사 계약서에 나와 있는 조합으로, 다시 소비자보호원으로…. 고씨 의 발걸음이 바빠지자 포장이사 회사에서 사람이 왔다. 그러나 그는 이 일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사과와 함께 보상을 약속했지만 받아들 일 수 없었다. 애초에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고씨는 사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몇번에 걸친 조합의 중재절차에서도 사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씨는 내용증명 우편을 보냈다. 사장의 소원대로 상세한 작품 제작비 내 역과 함께…. 그 복잡하다는 소송을 통해서라도 사장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을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회사에서 다시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곤란 한 처지를 몇번이나 설명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찌해야 하나…’. 집으 로 돌아가면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일 텐데 회사에서 사장에게 시달리는 모습이 그려지자 그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손해보상은 고스란 히 그날 이삿짐을 나른 사람들이 나누어 배상해야 한다는 소리에 고씨는 그들이 내미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두달여에 걸친 고씨의 발걸음을 일상에서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했던 또 다른 일과는 그렇게 끝났다. 사장을 만나면 반드시 알려주리라며 마음속 으로 몇번씩 되풀이하던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사장이 깨달았으리라 곤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다시는 그 사장이 자신에게 했던 그런 말투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작은 위안이 되어 고 씨의 가슴을 다독였다. 윤승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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