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

단1주만 있어도 소송 건다

“병든 사과를 치료할 새 의사를 찾습니다.”

미국의 컴퓨터업체 애플사는 최근 최고경영자를 새로 물색하느라 분주하 다. 개인용컴퓨터의 원조격인 이 회사는 지난 95년 4/4분기에만 무려 6천 9백만달러의 적자를 내는 등 경영상태가 계속 악화되자 지난해 초 부실기 업의 해결사로 명성을 날리던 길버트 아멜리오 회장을 새로 영입해 재기 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지난해 중반 잠깐 경영실적이 나아졌을 뿐 더 이상 회사가 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사회가 1년6개월 만에 그를 전 격 퇴진시키고 새 인물 찾기에 다시 나선 것이다.


경영 부실=경영진 사퇴는 상식

전문경영인제도가 정착된 미국에선 기업경영이 부실하면 경영진이 스스로 물러나거나 주주들이 나서서 퇴진시키는 게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투 자자인 주주들에게 책임을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회사의 주인은 곧 주 주”라는 이 대원칙 앞에서는 창업자라고 해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애 플사를 창업해 세계굴지의 컴퓨터업체로 키워낸 스티브 잡스는 85년 경영 부진으로 쫓겨났다가 지금은 애플사의 생산부문 자문역으로 고용돼 일하 고 있다. 부도 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으면서도 경영권만은 결코 못 내놓 겠다고 버티는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물론 주식회사 제도에서는 사람의 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식수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그만큼 대주주의 의견이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아무리 대주주라고 해 도 소수주주나 소액주주의 의견을 무시하는 결정을 함부로 내리지 못한다 . 그랬다가는 즉각 기관투자가를 비롯한 소액주주들이 대주주에 대항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은행의 기업주식 소유는 금지돼 있지만, 비은행권 기관투자가 들이 기업경영을 철저히 감시한다. 기관투자가들은 기업정책에 대해 간접 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이사회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고 공 개매수나 합병 등을 통해 투자대상 기업을 직접 인수하기도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무원퇴직연금기금은 연금가입자에게 최고수익률을 올려주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 기금은 따라서 평상시에는 미국과 일본 주식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지만, 투자한 회사의 배당실적이 기대에 못미 치거나 경영실패로 주가가 하락하면 곧 소액주주를 규합해 행동에 들어간 다. 95년과 96년 제너널모터스, 아이비엠(IBM), 웨스팅하우스 같은 거대 기업들의 경영실적이 형편없자 이 기금은 3개 회사의 최고경영진을 주주 총회를 통해 갈아치웠다. 위스콘신주의 공무원퇴직연금은 투자 기업인 멕 시코의 한 강관업체가 7백50만달러에 이르는 신주 발행을 시도하자, 불필 요한 증자로 경영부실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라며 주식발행을 무산시켰다. 90년대초 미국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 있는 진텔투자신탁은 이 회사가 많 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의 경영실적이 저조하자 소액주주들의 지분 을 72%까지 위임받아 경영권을 직접 장악하기도 했다.


“회사 임원, 보험부터 들어라”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이나 불법행위에 대해 소액주주들이 주주대표소송을 내는 일도 매우 흔하다. 미국의 경우 전체기업 가운데 20% 정도가 적어도 한차례 이상씩 소송을 겪었고, 해마다 2천∼3천여건의 소송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회사 임원이 되면 먼저 보험부터 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유럽에서도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제도는 철저하다. 미국과 비슷한 기업지 배구조를 갖고 있는 영국에서는 지난 95년 6월 브리티시가스사가 직원 임 금을 3%밖에 올리지 않으면서 대표이사 보수를 무려 71%나 인상했다가 주 주총회에서 4천여명의 소액주주들로부터 불신임을 당해 결국 경영진이 물 러났다.

독일의 경우엔 은행, 보험 등 금융기관의 주식보유비중이 높아 대기업 지 배주주의 70%가 금융기관이다. 그러나 종업원 5백인 이상의 기업은 경영 진과는 별도로 주주 및 종업원 대표로 구성되는 감독이사회를 의무적으로 두어야 하고, 2천명 이상의 대기업의 경우 감독이사의 절반을 종업원 대 표로 구성해야 하는 등 종업원에 의한 경영권감시제도가 잘 발달돼 있다.

우리나라처럼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편인 일본에서도 90년대 들어 소액주주들의 권리찾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93년 노무라 , 다이와, 야마이치 등 일본의 대표적인 금융회사들이 대주주의 주식거래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을 회사쪽이 대신 부담한 사건이 폭로되면서, 이 사 건은 소액주주들의 권리찾기운동에 불을 붙였다. 소액주주들을 대표한 1 백여명의 변호사는 그해 부실경영책임을 물어 니코증권 이사 16명을 상대 로 3백77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90년까지 전후 40년 동안 모두 10건에 불과하던 일본의 주주대표소송은 지난 93년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상법이 개정된 이후 8 4건, 94년 1백45건, 95년에 1백74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95년에는 한 건설회사의 임원들이 정부공사를 따내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의 뇌물을 건넨 사건과 관련해 소액주주들이 민사소송을 내, 형사처벌과는 별도로 “뇌물액을 회사에 변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소 액주주운동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낡은 제도 버려야

외국의 경우, 이처럼 경영진이나 대주주들의 전횡에 맞서 소액주주들이 자기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경영권에 대한 감시장치가 철저한 데다, 소액주주들의 권리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어떤 회사의 주식을 단 1주만 갖고 있어도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난 4월 증권거래법의 개 정으로 완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6개월 이상 전체주식의 1%(자본금 1천 억원 이상은 0.5%, 개정 전에는 5%)를 갖고 있어야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소송비용도 미국의 경우 연방법원 1백20달러, 주법원은 1백달러 정도에 불과하고, 일본은 8천2백엔만 내면 된다. 승소할 경우 변호사비용까지도 회사나 경영진에게 청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별도로 규정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변호사 보수에 관한 일반원칙을 적용할 수밖에 없어 소액주주로서는 소를 제기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형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돈을 맡아 투자한 기관투자가들이 주주로서 적극적인 구실을 하는 데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없지 않다. 기업의 인수합병(M &A)을 노리는 특정세력과 결탁하거나 재벌소속 기관투자가가 그룹의 이익 을 위해 행동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라의 경우 기관투자가들이 관치금융에 길들여져 그동안 투자한 기업의 경 영에 대해 마냥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 통된 지적이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는 “설령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 라도 지금은 기관투자가들이 적극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 관투자가들이 돈을 맡긴 고객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면, 고객의 돈을 투자 한 기업의 경영감시에 적극적인 구실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얘 기다.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필요하 다는 인식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의 소유형 태와 경영방식 등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 국제적인 규범을 만들려는 움직 임도 일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업위원회는 지난 6월 처음으 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했다. 이른바 ‘기업지배구조 라운드’가 전개되면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지 않은 국내재벌, 외국기업과 합작하 고 있는 기업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전망이다. 대주주의 전횡을 가 능케 하는 낡은 제도를 지키기 위해 국제무역에서 또 한번의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국내에서도 법개정을 비롯해 대응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 적이 높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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