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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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 가지고 내가 어떻게 쓰든 무슨 상관이야!”
소액주주 평균지분 60% 넘어
정 회장의 이런 당당함에 대해서는 ‘경영권’이라는 말 한마디가 모든 대답을 대신해준다. 경영권을 가진 기업총수는 적어도 기업 안에서는 왕 이다. 그가 기업의 돈을 어떻게 쓰든 그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결정이 어리석은 것이든 부도덕한 것이든 그것은 상관 이 없다.
한보, 삼미, 진로, 기아까지…. 올 들어 마치 도미노 쓰러지듯 잇따라 쓰 러진 재벌들은 한결같이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막대한 빚을 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끝내는 빚의 늪 속에 가라앉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무도 사전에 그것을 막지 못했다. 기업이 돌아가는 사정을 가장 잘 알 수 있었던 은행들은 말이 없었다. 뒤늦게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뒷북만 칠 뿐이다. 고객의 돈으로 주식을 사들인 기관투자가들, 속도 모르고 주식을 사 갖고 있던 소액투자자들은 폭락한 주가 앞에서 속만 끓인다. 그들은 경영권이라는 전가의 보도 앞에서 한마디로 ‘봉’이었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연말을 기준으로 국내 7백60개 상장법인에서 전체 주식지분의 1% 미만을 갖고 있는 소액주주수는 1사당 평균 1만2천1 백50명, 이들이 보유한 지분은 평균 64.36%에 이른다. 이에 비해 최대주 주들이 보유한 지분은 겨우 26.02%에 불과하다. 주식비율로만 본다면, 주 인노릇을 해야 하는 이들은 당연히 소액주주들이다. 그런데도 전체 지분 가운데 기껏해야 4분의 1밖에 갖고 있지 않은 대주주에 의해 기업의 모든 결정이 좌지우지된다. “기업이 잘못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대주주 아니냐. 그러니 딴말 할 것 없다”고 대주주들은 말한다. 그런 현 실 앞에서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는 말은 결국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재벌들은 총수 가족의 지분관리팀까지 따로 두어 경영권을 보호하고, 심 지어는 개인적인 재테크에 나서기도 한다. 부도 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으 면서도 경영권만은 결코 내놓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재벌 총수들의 집착 앞에서 사람들은 경영권의 이점이 얼마나 큰지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총수들만 재테크로 떼돈
대주주들이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전환사채 발행 이다. 전환사채는 즉각 주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그것을 우호세력에게 넘겨줄 경우 지분을 쉽게 늘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고스란히 소액 주주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지난 4월 증권거래법이 바뀌어 전환사채 발행이 까다로워지기 전까지, 기 업들은 앞다퉈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그 결과 전환사채를 발행한 기업의 주가가 대부분 10∼30%까지 떨어졌다. 주식이 짧은 시간 안에 공급초과 상태를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올 들어 3월 말까지 68개 상장기업이 모두 1조2천억원어치의 사모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채권을 발행했다. 이같은 물량이 모두 증권시장에 쏟아져 나올 경우 채권을 발행 한 기업의 주당 배당금은 평균 16.74%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총수들은 전환사채를 통해 편법으로 재산을 상속하기도 한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29)씨가 삼성그룹의 부동산관리 회사인 중앙개 발의 전환사채를 대거 매집해 순식간에 최대주주가 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비상장사인 중앙개발(자본금 35억원)은 지난해 12월 9억원어치의 사모전환사채를 주식전환가액 7천7백원에 발행했고, 재용씨는 그 가운데 97%를 비공개로 사들였다. 이로써 재용(29)씨는 순식간에 전체지분의 62. 5%를 갖게 됐다. 몇푼 들이지 않고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4백50만평을 비 롯해 전국 각지에 수많은 임야를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부동산회사 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지난 3월, 농심이 사모전환사채를 총수의 아들들에게 넘겨 아들들의 주식 지분을 12%까지 늘린 것도 비슷한 수법이었다. 농심은 지난해 6월 1백20 억원어치의 사모전환사채를 발행해 이를 동서증권과 현대증권, 농심계열 사인 율촌화학과 동원증권에 넘겼다가, 결국 동원(39·농심 사장), 동륜( 39·율촌화학 부사장), 동익(37·농심가 사장)씨 등 신춘호 회장의 아들 3명이 다시 넘겨받았다. 전환가격은 3만2천원, 당시 주식시세가 5만5천원 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86억원을 남겼다.
경영권을 이용한 총수들의 재테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원그룹 임 창욱 회장(현 명예회장)은 지난 94년 9월 계열사인 대한투자금융 법인지 분을 개인명의로 대거 매입했다가 1년 뒤 주식을 성원건설에 팔면서 무려 7백억원을 벌어들였다. 임 회장이 주식을 넘겨받을 때 주가는 1만3천원대 에 불과했지만 장외거래를 통해 성원건설에 주식을 팔 때는 주당 5만5천 원이었다. 그러나 보통 지배주주쪽 지분으로 인식되는 임원이나 우리사주 조합의 보유지분은 아무런 프리미엄도 받지 못했다. 임 회장이 기업의 내 부사정을 잘 아는 점을 이용했다면 부당내부자 거래에 해당되지만, 그것 또한 입증할 길이 없었다.
아무런 의견도 낼 수 없다
총수의 일방적인 결정이 소액주주들을 멍들게 하는 경우는 이 밖에도 허 다하다. 지난 95년 고려시멘트의 소액투자자들은 고려가 오너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덕산그룹에 거액의 지급보증을 서줬다가 덕산이 무너지는 바람 에 덩달아 큰 피해를 봤지만 하소연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같은해 7월 한국제지는 동해펄프의 주식 95만4천주를 주당 3만원에 공개매수했다. 동 해펄프의 주가는 1년 만에 41%나 떨어져 소액주주들은 1백67억원의 손실 을 봤다. 같은해 쌍용이 60만주를 공개매수한 인천투금의 주가는 1년 만 에 4분1로 떨어지기도 했다.
지난 95년에는 상장사인 대우중공업과 비상장사인 대우조선이 합병되면서 대우중공업의 주가가 1만6천원에서 하루아침에 1만원까지 폭락하는 사태 가 빚어졌다.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던 대우조선은 상대적으로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우중공업에 합병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지만, 대우중공업에 투 자한 소액투자자들은 합병에 대해 아무런 의견 개진도 못해 보고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재벌 총수만이 소액주주를 멍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한보철강이 무너지 면서 1조1천여억원을 물린 제일은행의 소액주주들은 제일은행이 담보도 제대로 확보하지 않고 정밀한 여신심사조차 없이 엄청난 돈을 빌려줬다는 사실 앞에 망연자실해 한다.
기업의 불법공시는 소액투자자들을 아예 농락하는 정도다. 상장사들이 자 사주를 사들이겠다고 공시한 뒤 매수주문을 내지 않거나 사모전환사채를 발행하고도 공시하지 않는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소액투자자들에게 돌아 가는 것이다. 지난 1월 초 (주)비비안은 자사주 6만주를 취득하겠다고 증 권거래소에 공시했다. 이에 따라 1월11일 4만7천8백원 하던 주가가 4월에 는 6만6천원으로 무려 38.1%가 올랐다. 그러나 비비안은 그때까지도 주문 을 내지 않았다. 뒤늦게 주식매입에 뛰어든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보았음 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전선은 3월18일 2백80억원 상당의 사모전환사 채를 발행하고도 한달 만에야 이를 공시해, 일반투자가들의 청약기회를 빼앗았다.
소액주주들은 ‘주가’만이 관심거리?
기업들이 대주주들에게 빌려주는 대여금도 자칫 자금사정이 나쁜 계열사 의 부도는 물론, 소액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칠 우려가 크지만 제재할 방법 이 없다. 올 들어 6월 말까지 상장기업이 지배주주나 계열사에 빌려준 대 여금은 모두 6천2백30억원. 이는 대여금 공시가 의무화된 지난해 8월부터 12월 말까지 5개월 사이 이뤄진 1천7백25억4천만원에 비해 2배나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공시 내용에는 대여금의 이자율이 명시되지 않고 있어 소 액주주들은 대주주들이 얼마나 혜택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대주주들의 이같은 전횡이 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소액주주들이 기 업경영에 간섭할 방법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중요한 결정 은 이사회가 내리지만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총수들이다. 한국경 제연구원이 지난해 전경련 회원사들을 상대로 이사나 감사 선임 때 소액 주주의 의견을 반영하는지 여부를 조사한 결과 “그렇다”고 대답한 기업 은 겨우 9.8%에 불과했다. 주주총회는 여전히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소액주주는 발언권을 얻기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도 소액주주들은 왜 주식에 돈을 투자하는가? 한때 증권에 투자했 다가 이제는 손을 뗐다는 김아무개(42)씨는 “우리나라에서 주식투자는 사실 투기에 가깝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경영자가 어떤 횡포를 부리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어느 회사의 주가가 오를 것인가가 유일한 관심거 리다”고 말한다. 주식을 산 기업이 망해도 “운이 나빴다”며 돌아서는 게 보통이다. 그는 언젠가는 다시 주식에 투자하겠지만 당분간은 끼어들 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왜? “더이상 돈 빌려주고 뺨맞고 싶지는 않 으니까.”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