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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는 얼마나 우리가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다 시 한번 절감케 해줬다. 신혼 부부와 피서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는 승객 들은 일상생활의 연장으로 떠난 해외여행이 다시는 그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재난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더욱 슬프 고 섬뜩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 없는 그러한 재난에 대해 그들이 아무 일 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희생자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 사건을 피한 우리 역 시 언제라도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아직도 사고의 원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매스컴은 오랜만에 좋 은 꺼리라도 만난 듯 연일 대문짝만한 뉴스와 해설기사를 전했다. 덕분에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활공각지시기(GS), 최저안전고도경보장치(MSAW), 지상근접경보시스템(GPWS), 미국 연방교통 안전위원회(NTSB), 연방항공국(FAA) 등이 우리의 해외여행 안전에 책임이 있는 중요한 항목들로 갑자기 떠올랐다. 이들은 모두 위용을 자랑하는 현 대 기술과학의 산물이거나 그 관리를 담당하는 전문가집단이다. 사고 원 인의 열쇠를 블랙박스가 쥐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 이 이해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실체라는 측면에서 또다른 ‘블랙박스’ 들이다.

비단 이들뿐인가? 부품 백만개로 이뤄져 있다는 항공기 자체가 하나의 큰 블랙박스이며, 여기에 공항시설, 항행체계, 항공회사, 여행사, 건설교통 부 등까지 합하면 원자력발전 이상의 거대한 기술시스템이 사실상 우리에 게 블랙박스로 남아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이 실제로 통제하지 못하는 이러한 블랙박스들에 수동적으로 의존한 채 그냥 살고 있는 것이 현재 보통시민들 삶의 모습이다. 기술사학자 휴즈(Thomas P. Hughes)는 1 9세기 말 전기의 발명과 확산을 사례로 거대 기술시스템의 진화과정을 설 명하면서, 기술과학과 사람, 조직, 제도 등의 이질적 구성요소들이 결합 되어 이뤄지는 기술시스템들의 지배가 현대사회의 특징임을 잘 묘사하고 있다. 기술시스템은 문제해결의 수단인 동시에 권력과 이해관계의 집합체 이기 때문에 일단 성공적으로 구축되면 자기영속성(‘모멘텀’)을 갖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대한항공기 추락 원인에 대한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집단들의 분 석이 현대 항공기술시스템에 내재된 근본적 위험은 논외로 한 채 사후적 이고 표면적인 실수나 부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국지적 요 인을 사고 원인이라 판정함으로써 부분적 수선에 그칠 뿐 블랙박스 전체 는 의심받거나 위협받지 않게 된다. 90년대에 들어서 신행주대교 붕괴, 구포역 열차전복, 아시아나항공기 추락,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 괴,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등의 대형사고가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언론과 정부는 인재(人災)임을 지적하 였을 뿐 기술시스템들의 지배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나 변화 필요성은 언 급하지 않았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주장하듯 산업 사회에서 부의 생산과 분배는 구조적으로 위험의 생산, 분배를 배태하고 있다. 거대 기술시스템은 거대 위험의 배태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장주의와 기술과학의 결합은 해외관광과 같은 물질적 풍 요를 낳았지만, 거대 항공산업처럼 산업화된 기술과학은 사실상 대형사고 의 위험을 그 안에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연이어 터진 사고들은 그 러한 위험의 일부 징후들에 불과하다.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선 현존 기술시스템의 해체와 재구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 변혁에 대 해 기업·정부·과학부문의 엘리트들은 기존 시스템의 기득권층이기 때문 에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시민이 나서서 기술시스템을 투명하고 통 제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더 이상 블랙 박스에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시민참여를 통한 기술시스템 의 감시와 통제와 재구성은 비현실적 이상이 아니라 위험사회에서 무력한 희생자가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생존전략인 것이다. 이 일은 당장 시작돼야 한다. 예컨대 이번 사고의 희생자 가족들부터 그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환석/ 국민대 교수·사회학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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