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역사속의 여성

항일전선에 선 개화기 선각자

1905년 봄, 서울 안현동(지금의 안국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용품 상 점이 문을 열었다. 여성이 직접 경영하고 여성이 쓰는 물건만을 파는 상 점이었다. 상호는 안현부인상점. 주인은 이일정(李一貞)으로, 오늘날 헤 이그 밀사로 널리 알려진 이준의 아내다.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긴 했지만 모름지기 점잖은 양반은 굶주릴지언정 학 문에 힘써야지 이익을 취하는 일에 나서선 안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 다. 더구나 양반집 여자는 바깥출입을 함부로 할 수 없고, 장바구니를 들 고 직접 시장에 나오거나 시장에서 물건 파는 여자는 천한 신분으로 여기 던 때였다. 그러니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17 대손이요, 과거에 합격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생인 이준의 아내가 상 점을 연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안현부인상점은 전면을 유리로 장식하여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모습 을 갖췄다. 이일정은 상점에 나와 바늘, 실, 실패, 단추, 분, 머릿기름, 빗, 족집게, 비누 등등 여성용 필수품과 살림살이를 팔았다. 그의 가게는 몹시 친절하고 값도 적당하게 불렀으므로 인기가 높았다. 주인이 여자였 으므로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몸종을 거느린 점잖은 댁 마님들까지도 나와 물건을 골랐다. 이준의 아내가 상점을 열었다니 한번 가보자는 호기 심도 적잖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간의 비웃음과 야유의 손가락질은 매우 심했다. 이일정은 가끔 좌절했다. 그때마다 그를 격려해준 것은 남편 이준이었다. “비웃는 자들 이야말로 어리석은 무리요, 앞으로 십년이 못 되어 오늘 코웃음치던 무리 들이 당신을 가리켜 우리 부녀계의 선각자요, 모범이라 칭송하리라”고 이준은 말했다 한다.

이일정은 이준의 후처였다. 형조판서를 지낸 김병시의 중매로 열여섯살 때 서른네살의 이준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병시의 아내와 이일정의 어 머니가 결의형제 사이였는데 한문과 수학에 뛰어난 데다 인품과 용모 또 한 빼어난 일정을 아끼며 그 배필을 찾던 김병시가 역시 자신이 아끼는 함경도 북청 출신의 이준을 점찍은 것이다. 고향에 처자가 있는데 어떻게 또 결혼할 수 있겠느냐는 이준의 말에 김병시는 “장래를 위해 오른팔이 될 동지가 필요하다”며 결혼을 적극 권했다. 마침 일정의 어머니는 김병 시가 인정한 사람이라면 두말없이 따르겠다 하여 두 사람의 결혼은 이뤄 졌다.

이일정은 과연 이준의 훌륭한 동지가 되었다. 이준이 항일운동을 하다 구 속됐을 때는 종로 거리에 나가 시위대열 앞에서 연설하는 대담함을 보였 으며, 이준이 유배당했을 때는 뒷바라지와 집안살림을 도맡았다. 그런 가 운데 이일정은 생각하게 되었다. ‘여자는 반드시 독자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아야 한다’고. 그가 이준의 동의를 얻어 살던 집을 팔아 안현동에 상점을 연 까닭은 바로 거기 있었다.

1907년 이준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만국평화회의 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했 다. 3년 뒤 일정은 남편의 유해를 가져오려고 아들 종승(첫부인 주씨 소 생)과 함께 러시아 하얼빈에 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종승은 그 길로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장부가 되어 천하를 호령 하라던 아버지의 말을 실천하기라고 하듯 그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손꼽히는 유격대장이 됐다. 이용(李鏞)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그다.

이일정은 외동딸 종숙이 지켜보는 가운데 1935년 쉰여덟살로 눈을 감았다 . 그로부터 약 30년이 흐른 뒤, 이준의 유해가 돌아와 서울 수유리에 안 장되고, 이일정도 그 옆에 묻혔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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