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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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객 두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음과 따뜻 한 정신을 각각 선물하고 돌아갔다.
브룩 리와 리타 더브가 그들이다. 한사람은 미스 유니버스이고 다른 이는 미국의 계관시인이다. 얼핏 보기에 미국에서 잘 나가는 여성이라는 점 이 외에 특별히 같은 점이 없어보인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배경으로 나란히 세워보면 둘의 닮은꼴은 선명해진다.
미스 유니버스.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닌 개성’이라는 단아한 마음가짐 때문일까. 현기증 날만큼 쏟아지는 선망 속에서도 브룩 리에겐 한 점 흐 트러짐이 없다. 그의 혈관엔 한국 중국 하와이원주민 백인의 피가 흐르지 만, 어쩌면 영원히 미국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릴지 모르는 이 다민족 혼 혈 사실을 그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받아들인다. 미스 유니버스로 선발된 뒤 그는 먼저 여러가지 색깔의 가족과 친지 앞에서 훌라춤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릴 적 엄마 아빠 앞에서 재롱부리듯.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이민한 할아버지의 나라, 그 나라를 체험하기 위해 군시절 한국 근무를 자원했던 아버지, 그가 60 년대 헐벗은 고국의 거리와 풍물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며 전해주던 이야 기, 그는 이런 칙칙한 뿌리의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한다. “아버지는 항 상 한국계 핏줄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가끔 제가 고집을 부릴 때 면 ‘저 봐라, 한국기질이 나온다’라고 놀리시곤 했지요.”
방한중 한 방송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어디가 가장 예쁜 것같으냐’는 그저그런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참으로 빛났다. “하트(마음 또는 정 신).” “심사위원들께서도 제 겉모습보다는 정신(마음)을 보고 후한 점 수를 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겐 우리말 이름도 있다. 여전히 모든 우리 누이들의 상징처럼 남아있는 순희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리타 더브 역시 아프리카 흑인의 피와 원주민 인디언의 피가 흐른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바닥으로 만 흐르는 이 피를 물려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기억은 브룩 리 이 상이다. “나는 시를 쓸때 항상 내가 아프리카 흑인이고 차별받는 여성이 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런 시각에서 미국 사회의 문제를 걸러내려 한다 .” 그에게 퓰리처상과 함께 미국 최초의 그리고 최연소 계관시인의 영광 을 안겨준 시집 <토머스와 뷸라>는 20세기초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할아 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20년전 할머니의 무릎에 턱을 괸 채 들은 이야기들이다. 여기에 빛나는 상상력으로 씨줄을 삼고 따뜻한 감수성으로 낱줄을 삼아 시를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시는 버려지고 내쫓 기고 빼앗김만 당하던 삶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함께 그 울림에 취하는 노래로 발효됐다. “그에게, 노동은 가느다란 슬픔/일이 끝난 다음의 음악은/그의 가슴에 손을 넣어/그 슬픔을 문질러 펴는/여자 와 같다….”(밀짚모자)
사람을 마음으로 보지않고 이해로 따지는 곳, 뱀의 눈으로 서로의 장점보 다는 약점만 노리는 곳, 권력은 억압의 동의어이고 정치는 거짓이라는 규 정이 낯설지 않은 곳, 그리하여 포르노배우의 팬티와 브라자에 열광할 뿐 정신의 아름다움은 외면당하는 곳.
그 둘은, 자신을 쫓아낸 오염된 땅에 홀연히 돌아온 단정학처럼 귀하고 귀하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