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기아사태, 김영삼-이회창 담판만 남았다

“기아 살리기와 김선홍 살리기는 구분해야 한다.” 재정경제원 한 간부 의 말은 기아사태를 바라보는 강경식 부총리의 시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다. 김선홍 체제가 유지되는 한 정부나 채권단의 기아 지원은 있을 수 없 다는 것이다. 반면 기아는 “정부가 김 회장의 사표제출을 고집하는 것은 김 회장을 즉각 퇴진시킨 뒤 기아의 자력회생을 무산시켜 제3자에 인수시 키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기 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을 직접 방문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하던 기아사태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된 밑바닥에는 정부와 기아간의 이같 은 현격한 시각차가 깔려 있는 것이다. 기아사태의 초점이 김 회장의 거 취 문제로 단선화돼가는 양상이다.


기아해법, 이회창-강경식 삐걱

이회창 대표는 지난 8월14일 소하리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선홍 회장 등 기아 임직원들에게 “기아사태는 제3자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며 기아의 제3자인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기아 스스로 기업회생을 위한 확고한 의지와 능력을 발휘한다면 당과 정부는 기아회생 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이 대표의 말은 “정부가 기아를 특정기업에 인수시키려 한다”는 의심을 떨 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기아에게는 천군만마의 원군과 같은 것으로, 즉각 기아사태에 대한 정부의 기존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낳 았다. 두 아들의 병역시비로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이 대표가 국면전환 용 지렛대로 기아를 활용하려 한다거나, 최소 1백만표에 달하는 ‘기아표 잡기’에 나섰다, 특정그룹과의 유착설을 불식시키려 한다는 지적과는 관 계없이 기아사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풀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낳 았다.

그러나 이 대표의 기아사태 중재는 김 회장의 거취 문제에 부딪히면서 삐 걱거리기 시작했다. “김선홍 회장이 사표를 제출하되 사표 수리는 기아 의 자구노력을 지켜본 뒤 결정한다”는 이른바 ‘조건부 사표’ 제출설이 돌기 시작한 것은 이 대표의 기아 방문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기아에 사 실 여부를 확인하던 취재진 사이에서도 “절묘한 절충안”이라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일이 꼬일 조짐은 곧 드러났다. 김인호 청와대 경제 수석이 즉각 “기아문제는 기아와 채권은행단 간에 협의해 해결해야 한다 . 경제논리로 풀어야 할 문제를 정치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야당 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이어 ‘기아 죽이기’ 의 장본인으로 지목돼 온 강경식 부총리도 “대주주가 있는 회사의 경우 부도유예협약 적용을 받기 위해 주식포기각서를 내는 것처럼 기아에 대해 경영진 사표와 노조의 인원감축 동의서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아 사태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며 쐐기를 박았다.

김 회장의 사표 제출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이던 기아도 이날 밤늦게 “ 사실 무근”이라고 공식부인하고 나섰다. 경영혁신기획단의 송병남 사장 은 “김 회장 사퇴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채권단에 제출한 자구계획 이행 각서(김 회장 등 기아 경영진은 지난 7월말 채권은행단에 ‘책임을 통감 합니다. 언제든지 물러날 것을 각서하나이다’라는 각서를 제출했다)로 충분하다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선정상화- 후퇴진’이라는 종전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송 사장은 아예 사태해결 을 위해 김 회장과 임창렬 통상산업부 장관이 만난 사실조차 부인했다.


기아는 정부를 믿지 못한다

그러나 김 회장은 지난 8월9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임 장관, 서상목 신한 국당 의원 등과 극비리에 만나 기아사태 해결방안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 는 기아출신의 이신행 의원도 동석했다. 신한국당 관계자는 “4자회동에 서 기아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아가 한걸음씩 양보해야 하며 그 연장선에서 김 회장의 조건부 사표제출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안 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 회장은 왜 4자회동에서의 합의를 깬 것인가? 기아는 그 이유 를 이렇게 설명한다. “김선홍 회장이 물러나면 기아가 제시한 자구계획 이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김 회장이 기아특수강 처리나 부동산 매각 문제를 다른 그룹 총수들과 담판지으려 해도 ‘끈 떨어진’ 처지에 서는 불가능하다. 직원들이 물러나겠다는 김 회장을 만류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기아 내부에 김 회장을 대신해 회사 정상화의 중심이 될 인 물이 없다. 정부가 기아를 살리겠다는 마음이 정말 있다면 기아 정상화에 꼭 필요한 김 회장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기아가 조건부 사표 제출을 거부한 배경에는 정부 불신이라는 좀 더 근본적 이유가 깔려 있다. 기아 계열사의 한 사장은 “정부나 채권단 이 김 회장의 사표 제출에 그토록 집착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사표 수리는 이사회나 주총에서 처리할 사안이기 때문에 김 회장의 사표 제출 이 바로 퇴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정부나 채권단의 설명이 지만, 즉각 사퇴시킬 것도 아니면서 사표를 고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 다”고 말한다. 정부, 채권단이 내부적으로는 ‘사표 제출→즉각 퇴진’ 의 각본을 갖고 있다는 시각인 것이다. 그는 “정부와 채권단이 김 회장 의 사표를 볼모로 기아차에 대한 수출환어음 할인, 수요자 금융 등은 물 론 국민경제 차원에서라도 미뤄서는 안 되는 1만7천여 기아 협력업체들에 대한 진성어음 할인조차 외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다른 데 있음 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아의 또다른 관계자는 항간에 나도 는 ‘기아 3자인수 시나리오’의 제2단계가 김 회장 퇴진임을 상기시켰다 . 이런 기아의 시각은 지난 8월14일 저녁 조건부 사표제출 문제를 협의하 기 위해 김 회장 집무실에 모였던 사장단들이 “정부와 채권단의 가시적 인 지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표를 내는 것은 이용당할 소지가 크다”며 만류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기아 내부에서는 이미 정부가 김 회장 개인 비리에 대해 광범위한 내사를 벌였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따 라서 김 회장이 8월17일 중국 현지에서 열리는 자동차 합작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격 출국한 것은 정부에 “사표 불가”라는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라는 게 기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계열사 노조 인원감축 동의서 제출

정부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김 회장 퇴진이 기아 살리기의 전제가 돼야 한 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정부는 김 회장 사표제출이 불가피하다는 이유 로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은 다른 그룹들과의 형평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김 회장이 자구노력을 내세워 시간을 끌다가 결국 물러나지 않으려 한다는 의심과 함께 기아노조와 김 회장이 사실상 한배 를 타고 있어 김 회장이 물러나지 않는 한 기아 정상화의 큰 걸림돌로 꼽 고 있는 노조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재경원의 한 간 부는 “기아가 우호적인 국민 여론과 기아사태에서 한건 올려야 하는 이 회창 대표의 처지를 감안해 좀더 버티면 김 회장 사표제출 없이도 정부와 채권단의 지원을 얻어 낼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 다”면서 고 말했다. 재경원이 지난 8월16일 제일은행에 대해 한은 특융 을 포함한 지원조건으로 ‘좀더 강도 높은 자구노력’을 요구하고 나온 것도 ‘제일은행 지원→기아 지원’이라는 등식을 깨려는 의도로 분석된 다. 임창렬 통산장관도 지난 8월16일 해외출장에서 귀국하면서 “김 회장 의 사표가 없이는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채권단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뜻 을 분명히 했다.

정부와 기아가 김 회장의 사표제출을 놓고 팽팽히 맞서고 있는 시점에서 마지막 남은 변수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쪽의 대응이다. 이 대표쪽의 한 관계자는 “정부와 기아간의 상호불신으로 꼬이기만 하던 기아사태에 대 화의 물꼬가 트인 것은 사실 아니냐”면서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해결 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이 대표쪽은 16, 17일에도 기아 사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정부, 기아와 물밑접촉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 다. 기아도 17일 아시아자동차 등 4개 계열사 노조가 인원감축 동의서를 낸데 이어 기아차 노조도 동의서 제출을 적극 검토하는 등 중재노력의 짐 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에 나섰다. 이와 관련 정부의 한 관계자는 “향후 기아사태의 향방은 지금껏 강경식 부총리 방식의 해법에 무게를 실어 준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대표와의 담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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