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
|
(사진/93년 10월 베이징에서 북한의 유미영 조선천도교
중앙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한 천도교 전 교령 오익제씨.
그의 월북 동기에 관한 추측들은 갖가지다.)
천도교 전 교령인가, 국민회의 전 고문인가, 아니면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의 상임위원인가.
어떤 일을 가장 열심히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1인3역을 하다 북으 로 홀연히 떠난 오익제(68)씨로 정치권이 다시금 색깔론의 소용돌이에 휩 싸였다. 가장 인연이 깊은 천도교는 오씨의 교인자격을 박탈하는 ‘출교( 黜敎)조처’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태풍의 중심으로 빠져든다. 특히 오씨의 월북이 황장엽 파일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면서 전면적인 공안정국을 알리는 조짐이 구체화되고 있다.
진흙탕 ‘색깔논쟁’으로 번질 수도
메뚜기 제철을 만난 듯 반기는 쪽은 여당이다. 신한국당은 이번 월북사건 을 아들 병역문제로 곤경에 처한 이회창 대표를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 회로 이용하고 있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 대한 지금까지의 의혹을 총 정리해 제기하면서 “철저한 사상 검증이 필요하다”며 총공세를 전개하 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 등 야당은 대선 때마다 북한 관련 사건이 일어나 선거의 흐름이 뒤바뀐 경험을 상기하면서 “더이상 밀리면 설 자리가 없다”는 위기의식에 정면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국민회의는 오씨가 기본적으로 친여인사이며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직속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을 81년 이후 17년째 하고 있는 점을 들어 “사상 검증의 책임이 있다면 그 책임은 정부가 져야 한다”고 맞서고 있 다. 국민회의는 색깔논쟁이 계속된다면 이회창 대표 부친의 사상문제와, 간첩사건과 관련된 여당 인사들 문제를 중심으로 ‘역색깔론’을 제기할 태세다. 이에 따라 색깔논쟁은 헌정사 최대의 규모로 번질 공산도 크다.
한편 정치권의 싸움과는 관계없이 월북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도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다. 특히 68세라는 고령인 점을 들어 황장엽 비서의 월남 동기와 비교하는 이들도 많다. 먼저, 오씨를 근처에서 지켜 본 천도교 인사들은 “여러 가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입을 모은 다. 지난 8월16일 천도교의 기자회견에서 김재중 현 교령은 이에 대해 “ 교회에서 탈락했고 국민회의에서도 대접 못받고 가정에도 불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탈락했다는 분석은, 오씨가 지난 94년 8월 5년여 동안 해온 천 도교 교령직에서 물러난 이유와 관련이 있다. 오씨는 당시 천도교 1백주 년기념관 지하주차장 건설과 관련해 건설회사와 수의계약을 체결하는 과 정에서 물의를 빚고 교단에 재정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교단으로부 터 ‘정권처분’을 받고 교인 자격을 정지당했다. 이 사건은 현재 서울민 사지방법원에서 3억5천만원 소송가액으로 재판이 진행중이다. 재판과는 무관하게 8월24일이면 오씨의 정권 상태가 해제될 예정이었다. 주변인물 들은 “정권 상태에서도 오씨는 일요일이면 가끔씩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 만, 교령까지 했던 그를 대접해주는 이가 거의 없어 소외감이 심했다”고 말했다. 무력감은, 그가 교령직을 그만두고 개인적인 결단으로 찾아간 국 민회의에서도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5월 전당대회 이후로 국민회 의는 고문단을 재위촉하지 않아 오씨는 더이상 고문이 아니었다. 지난해 총선 때 전국구 의원 공천을 받지 못한 그에게는 결정적인 상실감을 가져 다줬을 수 있다. 게다가 “심한 당뇨로 오래 전부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는 게 측근들의 증언이다.
개인적인 불행과 고립감
이를 종합해보면, 오씨는 개인적인 불행과 고립감 때문에 남쪽보다는 북 쪽을 선택했다는 추론에 이른다. 평남 성천이 고향이고 북에 아내와 딸을 두고 있어 항상 그리워했다는 사실도 이 추론을 뒷받침한다. 주변인사들 은 “93년 베이징에서 열린 천도교의 남북교류 회담 때 북한의 가족 소식 을 들은 이후로는 더 보고 싶어했다”고 전한다.
90년대 이후 월북자 상황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90년대 월북자들의 월북 동기가 주로 사업과 결혼생활 실패 등 개인적 사 정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 90년 이후 이뤄진 여당 인사들의 월 북사건이 이를 증명해준다는 것이다. 91년 4월에는 당시 민자당 중앙위원 인 김휘원씨가 월북해 색깔논쟁이 일었다. 그는 81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이후 88년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려다 실패한 뒤 민자당 중앙위원의 자격으로 월북했다. 지난해 1월에는 민자당 익산지구당 선전부장 정운영 씨가 월북했다. 90년 2월 빚에 몰린 기업체 대표 김원석씨 부부의 월북은 경제적인 곤란이 동기였다.
이에 대해 오씨의 월북이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과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있다. 통일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달랐다는 게 주변의 증언이다. 그는 남북교류를 성사시키기 위해 교령 재직중이던 지 난 93년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천도교 관계자들과 만나 회담도 가졌다. 이후 남북 천도교 관계자들은 판문점에서 실무회담을 가지고 동학혁명 1 백주년 기념행사를 공동으로 가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오씨가 보인 열정은 대단했다고 한다. 한 측근 인사는 “오 씨가 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남한 당국이 남북교류에 소극적인 데 대해 무척 낙담했다”고 전했다.
통일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천도교 안에서의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그 는 천도교 산하 조직인 민족통일연구회를 이끌었고 교령이 된 이후에는 이 조직을 동학민족통일회로 확대 개편하기도 했다. 한 측근 인사는 “오 씨는 내외통신을 꼼꼼히 읽고, 북한에 드나드는 해외교포들과 만나 북한 소식을 듣는 등 북한 정보에 대해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정치문제를 떠나 남북 종교인들이 자유롭게 만나는 일은 하루빨리 이 뤄져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주변인사들은 전한다. 이런 신 념 때문인지 그는 교령직을 수행할 당시 보수와 진보를 떠나 ‘통일’이 라는 문패를 건 조직에는 어디에나 관심을 보이며 찾아다녔다. ‘범종단 남북교류추진협’ 같은 보수 색채가 짙은 조직에서부터 ‘새 통일운동체 ’결성 작업 같은 진보적인 움직임까지가 다 포함됐다. 94년 1월 교령 재 직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의 열망인 통일을 빚어내지 못 하는 민주주의는 내용이 빠진 가짜 민주주의”이라거나 “민족이 있고 나 서 국가가 있다. 때문에 통일노력을 공권력이 제재하는 것은 부당하다. 김구 선생과 문익환 목사는 그래서 정당했다”고 밝히는 등 통일에 대한 절대적인 강조를 내비쳤다. 그의 이런 활동으로 종단 안팎에서는 “너무 튄다”는 비난의 소리가 터져나오곤 했다.
“천도교는 북한 제1의 종교”
통일에 대한 관심은 남북교류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는 교리에 따라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통일이 이뤄져 야 한다는 정책을 밝혀왔다. 이에 따라 한국의 민족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남한 당국의 통일정책이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월북한 역사를 가지 고 있다. 86년에는 역시 천도교 교령을 지낸 최덕신씨가 월북했고, 95년 에는 대한민국 정부 초대 문교부 장관이자 대종교 총전교 안호상씨도 밀 입북했다. 이는 북한의 민족종교에 대한 정책과 관련이 있다. 천도교 김 재중 현 교령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전체 종교인을 5만명으로 보는데 이 가운데 42%가 천도교인으로 천도교는 북한 제1의 종교”라고 밝혔다. 또 북한에서는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노동당의 우당으로 천도교청우 당이라는 이름으로 천도교가 정당조직으로 남아 있고, 남쪽의 국회에 해 당하는 최고인민회의에 20여명의 천도교인들이 진출해있다고 알려져 있다 .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민족정통성 확보를 위한 고도의 심리전” 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남쪽의 천도교 지도자들에게는 북의 상황을 긍 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하다. 게다가 북한은 이들 민족종교인들 이 주장하는 ‘민족자주’에 대한 입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지난 94년 단군릉을 발굴해 성역화하는 작업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민족정통성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인상을 줬다.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 로서는 특기할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오씨가 북 체제를 동경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오씨 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한 주변인사들은 하나같이 “오씨가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인사는 “오씨 가 특히 부자세습체제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하며 비판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 측근에 따르면, 그는 교령으로 있을 당시 <공산 주의 비판>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낸 적도 있다고 한다. 86년 월북한 최 덕신 전 교령에 대해서도 “민족을 등지고 갔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한 측근은 “오씨가 통일원과 문체부쪽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말 해 반정부적 시각에서 활동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주변인물들은 오씨가 평양 도착 성명에서 북한사회를 찬양한 데 대해 “ 액션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북한에 대한 기본적 인 정보가 있었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미리 알고 있었다” 는 것이다.
그의 월북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어쨌든 한동안 이 사건은 황장엽 파일 로 이어져 정치권 소용돌이의 진앙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그의 월북을 놓친 공안기관은 뒤늦게 수사를 정치권 전반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히고 있 으며 일부 정파는 황장엽 파일의 공개적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김창석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