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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 또다른 울림

잔뜩 긴장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긴장의 전면에는 정신대 문제라 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거대한 역사의 산을 마주한다는 ‘정신일도’(精 神一到)가 포진하고 있었지만 그 뒤로는 ‘재미없는 영화 억지로 보기’, ‘재미없어도 재미있었던 척 하기’, ‘절대 졸지 말기’라는 더 거대한 산과 씨름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누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2>의 시사회 가 열린 8월14일 오후 동숭아트홀에서였다.


절절한 아픔에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95년의 <낮은 목소리>가 정신대 할머니들의 과거 핏빛 삶을 눈물로 찍어 증언한 ‘진실의 장’이었다면,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현재 일상을 그대로 담은 <낮은 목소리2>는 분노를 넘 어선, ‘진실 너머의 장’이었다. 영화 전반부는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 김장을 담그고, 닭을 키우고, 호박을 캐내는 장면들을 그냥 내보냈다. 전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할머니들의 연기는 자연 그 자체였다. 심한 사투리와 불분명한 발음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조금 지나니 할머니들이 느껴진다. 자연채광, 롱테이크에 영화 속 주인공 들은 일상이지만, 이를 바깥에서 엿보는 관객에겐 폭소의 대상이 되는 할 머니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분위기다.

그러나 <낮은 목소리2>는 이런 내용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영원히 가시 지 않을 절절한 아픔이 곳곳에 들어있다. “여자들이 매독에 걸려가지고 자궁에서 피가 나고 걸음을 못걸어 가지고 엉거정 엉거정 걸어다니는 그 게 항상 기억도 나지만 꿈에 보여.” “나는 소원 그거밖에 없어, 그래 배가 불룩하이 아(아기) 하나 낳아 봤으면…, 제일 그기 소원이라.” 그 렇지만 아픔을 넘어 세상의 편견과 육체적 고통에 쌓여있던 삶을 딛고 이 제 오히려 세상을 이끄는 할머니들은 너무도 당당했다. “나는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군인이 되고 싶어. 군인 가서 이 나라를 잘 지키고 싶어ㅎ” “우리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울 테니까. 우리 할머니들 그리 쉽게 안 죽고 싶어요. 오래 좀 살거예요.”

영화는 중반 이후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강덕경 할머니의 마지막 투병장 면을 뒤쫓았다. 병상에 파리하게 누워있는 강덕경 할머니의 손을 꼭잡고 박두리(75) 할머니가 “빨리 낫아가지고 집에 와서 그림 그리야재, 니 그 림 최고 잘 그리는데…. 그쟈? 그쟈? 맛있는 거 해 주꾸마”라고 말할 땐 객석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목소리2>는 강 할머니 의 임종, 장례, 입관, 그리고 남은 자들의 통곡을 빼곡이 채워나갔다.

영화의 마지막은 강 할머니의 죽음으로 무거워진 분위기를 뒤로 하고 미 래를 암시하듯 씨뿌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항상 얻어물(얻 어먹을) 수만 인나? 내년에는 여러가지, 열두가지 더 지을거야. 우리 힘 으로 농사를 해 가지고 오시는 분들도 맛있는 거 좀 이래 갈라주고, 갈라 묵는 세상이 돼야재”라고 말하는 할머니들은 철인(哲人)처럼, 때론 해탈 한 성자(聖者)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중고생 관람 거부할 건가

8월23일 동숭씨네마텍에서 개봉하는 이 영화는 일본에서도 상영될 예정이 다. 변영주 감독이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95년의 <낮은 목소리>는 일본 1백35개 도시에서 상영돼 많은 중고생들이 관람했다. 학교쪽 요구에 의한 단체관람도 많았다. 20만명의 일본인들이 <낮은 목소리>를 봤다. 한국에 선 3만명 정도. 대부분 대학에서의 상영이었다. 당시 제작진들은 한국 중 고교생들에게도 보여줘야 되겠다는 생각에 각 학교로 단체관람 공문을 보 냈으나 90% 이상의 중고교에서 거부했다. 그 이유는 “어린 학생들에게 성과 관련된 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거였다. <낮은 목소리2>는 어떨까?

강덕경 할머니는 마지막 병상에서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고 힘들게 입을 떼며 제작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 나중에 다 볼 수 있 도록…. 내가 저 세상에 가서라도 기도할거고, 시청자들이 많이 생겨서 우리를 좀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래요.(…) 내가.”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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