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문화

세상을 껴안는 `소녀의 감성'

(사진/가족만화로 출발한 초창기 순정만화 작품들.
당시 순정만화는 대본소의 횡포와 검열 등 때문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순정만화가 금발을 휘날리는 백마 탄 왕자가 등장하는, 소녀들의 백일몽 에 기댄 만화라는 생각은 순정만화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 는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만화는 어린이들이나 보는 유치하고 유아적인 매체라는 고정관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오해에 불과하다. 만화에 대한 고정관념은 만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순정만화에 대한 고정관 념은 순정만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8월14일부터 21일까지 KOEX에서 개최된 제3회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SICAF)은 첫 기획전으로 순정만화를 택했다. SICAF쪽은 이에 대해 “순정 만화는 만화 중에서도 특히 장래성이 주목되는 분야로 특히 독창성 있는 신예작가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돼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분야”라고 말 했다. 그러나 순정만화는 지금까지 소외받는 만화 중에서도 소외를 한아 름 더 떠안은 분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장르

‘순정만화’라는 독특한 장르는 우리나라와 일본과 대만 등 동아시아 만 화권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대만의 순정만화는 대부분 우리나라의 순정만 화나 일본의 소녀만화를 수입한 것으로 자국의 순정만화를 보유한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유일하다.

우리나라에 순정만화라는 명칭이 탄생한 것은 1950년대의 작품에서부터이 다. 이 시대의 작품군은 활극만화, 명랑만화, 가족만화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순정만화는 가족만화의 하나로 탄생했다. 가족만화는 영웅적인 주 인공의 활약상이 강조되는 활극물이나 코믹한 전개로 웃음을 주는 명랑물 과 달리 이야기의 전개를 통한 감동의 전달에 주력했다. 가족만화의 전형 적인 작품으로는 김종래의 <마음의 왕관>, <눈물의 수평선>, 최상록의 50 년대 작품 <오빠만세>와 <말숙이> 등과 권영섭의 <오손이 도손이> 등을 꼽을 수 있다. 활극만화나 명랑만화 등 남자 주인공을 내세운 데 비해 가 족만화는 영웅적인 남자 아이나 개구쟁이 남자 아이 대신 가족의 구성원 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로 인해 많은 소녀들이 가족만화의 팬이 되 었고 이를 기반으로 가족만화는 소녀팬을 겨냥한 소녀취향 만화로 변신하 기 시작했다. ‘순정(純情)’이라는 용어는 <만화세계> 1956년 10월호에 실린 정파의 <흰구름 가는 곳>의 타이틀에서 최초로 발견할 수 있다(손상 익, <한국만화통사 하>, <미스터 블루> 97년 11호). 순정만화라는 명칭은 가족만화가 소녀취향만화로 변신하기 시작한 과정 속에서 맑고 깨끗한 마 음(순정·純情)의 주인공 소녀가 등장하는 만화를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 칭이라고 볼 수 있다.

소녀취향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만화에서 조연에 머물렀던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데 있다. 1960년대를 풍미한 권영섭의 인기작 ‘봉선 이 시리즈’는 착하고 귀여운 여주인공 ‘봉선이’를 내세워 히트한 첫번 째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봉선이’는 첫 시리 즈인 <울밑에선 봉선이> 이후 조금씩 성격과 생김새를 달리하며 많은 독 자들에게 인기를 모았다. ‘봉선이’는 최초의 순정만화 히트 캐릭터인 셈이다.

1953년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가 <소녀클럽>에 연재되며 일본에 는 소녀팬을 겨냥한 소녀만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소녀만화는 데즈카가 개척한 동그란 얼굴에 커다란 눈을 작화의 기본으로 채택한 뒤 이를 더욱 심화시켜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한 소녀만화적 화풍을 정착시 켰다. 이러한 일본 소녀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60년대 우리나라의 순정 만화는 좀더 적극적으로 여성 독자들을 겨냥한 작품으로 변화하기 시작했 다. 최상록, 권영섭 등의 50년대 작품은 당대의 다른 작가들(박기정, 박 기준 등)과 유사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봉선이가 등장한 첫번째 작품인 < 울밑에선 봉선이>의 캐릭터는 박기정의 <가고파> 등에서 나온 소녀 캐릭 터와 유사하다. 그러나 60년대 출판된 봉선이 시리즈의 봉선이는 50년대 봉선이와 다른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한 스타일로 변화했다.


가족만화로 출발… 70년대 한때 고사 위기

그러나 순정만화 역시 검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순정’(純情 )이라는 용어적 한계 속에서 출발한 순정만화는 단순한 소녀취향적 만화, 마음 착한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권선징악의 해피엔딩 만화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소녀만화는 순정만화전문잡지의 연재를 통한 치열 한 경쟁 속에 급속도로 발전한 데 비해 우리나라의 순정만화는 독점적인 대본소 출판의 횡포와 검열로 인해 작가의 자유로운 창의력은 봉쇄되었고 결국 작품의 질적 성장도 불가능했다. 정체되어 있는 순정만화를 독자는 외면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순정만화는 대본소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환상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한 일본 소녀만 화와 달리 전후 피폐한 경제상이나 혼란한 사회상을 작품 속에 빼어나게 반영한 초기 순정만화의 가능성은 검열과 전근대적인 유통구조라는 벽에 가로막혀 더이상 발전하지 못한 채 가능성을 다음 세대로 넘겨주어야만 한 것이다.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순정만화가 사라진 빈자리를 일본 소녀만화의 걸작이 차지했다. 라이트 박스에 원작을 대고 베껴 우리나라 만화인 양 잡지에 연재되거나 부록으로 제공되던 일본 소녀만화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했다. 일본소녀만화의 경쟁력은 대 단한 것이었다. 자유롭고 안정적인 창작기반은 70년대 중반 이후 일본 만 화사에 획을 긋는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유리의 성> <생도제군> <캔디 캔디>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의 걸작들은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한동안 자신의 만화를 갖지 못했던 소녀팬들을 사로잡았다. 잘짜여진 플 롯에 섬세한 선과 심리표현으로 무장한 일본 소녀만화는 일대 붐을 이루 었고 우리나라 순정만화의 부활을 촉진시켰다.

황미나, 김진,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등 대본소의 장편을 통해 화려하 게 데뷔한 80년대 순정만화 작가들은 일본 소녀만화에서 규범화시킨 형식 적 특징을 받아들여 우리 순정만화의 정착에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자유 로운 칸 나누기, 수용자와 적극적인 연대를 위한 캐릭터의 부각, 심리 표 현을 위한 내레이션 활용 등의 형식적 특징을 기반으로 우리나라 만화에 서 보여주지 못했던 빼어나고 풍부한 심리표현을 성공리에 정착시켰다. 빼어나고 풍부한 심리표현(정서와 감정의 표현)은 다른 장르에서 보여주 지 못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정착

이들은 ‘순정’(純情)이라는 소극적인 규정을 작품을 통해 확장시켰다. ‘사랑’은 로맨틱한 환상의 자리를 박차고 작품 전체의 진지한 담론으로 귀환했다. 우주와 신에 대한 이야기, 세상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 전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혁명과 동지에 대한 이야기, 우정과 학교에 대한 이 야기는 순정만화만이 가능한 섬세한 심리표현들을 통해 그려졌다. 황미나 의 <불새의 늪> <안녕 Mr. 블랙>, 김혜린의 <북해의 별> <비천무> <테르 미도르>, 김진의 <1815> <불의 강>, 강경옥의 <별빛속에> <17세의 나레이 션> <스타가 되고 싶어>,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딸들> <1999년생>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우리나라 만화사에 보기 드문 놀라운 확산과 발전의 단계를 거친 순정만 화는 마침내 80년대 후반 순정만화 전문잡지를 탄생시켰다. 당시 어린이 를 대상으로 한 월간 만화잡지는 있었지만 장르별 구분이나 연령별 구분 은 꿈꾸지도 못할 시기 순정만화는 장르전문잡지를 탄생시킨 것이다. 또 한 10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순정만화시장의 특성으로 인해 순정만화전문 잡지는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겨냥한 작품이 아닌 청소년 이상 계층을 독 자층으로 겨냥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 만화사상 최초의 실험이었고 그 실험은 성공했다.

순정만화전문잡지의 성공으로 인해 순정만화 시장은 대본소에서 전문잡지 시장으로 급속도로 이행되기 시작했다. 순정만화의 독자들은 만화를 빌려 보는 전근대적인 시장구조를 스스로 거부하고 사서 보는 시장구조를 정착 시켰다. 또한 순정만화는 전통적인 도제방식의 문하생 구조 대신 동호회 활동을 통한 작가수업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확산시켰다. 90년대의 주목받 는 순정만화 작가들 중 많은 수가 동호회 활동을 통해 배출되었다. <게토 잼>, <피플>의 이진경, 한국형 판타지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마니>의 유시진, 박희정은 ‘PAC’, <세가지색 레이디>, <거의보감>의 조강연, < M&M>의 김은희는 ‘KGB’, 미스터리 시리즈 <일루션>의 한혜연은 ‘블래 스트’, 문계주는 ‘결’에서 활동했다. 90년대 데뷔한 작가들은 대부분 두가지 경로를 통해 공식 지면에 데뷔했다. 하나는 잡지사의 공모전에 응 모해 당선된 경우고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 만화계에서 빼어난 실력을 인 정받아 잡지사에 발탁된 경우다. 공모전 당선을 통해 데뷔한 작가는 한혜 연(터치), 김은희(르네상스), 유시진(르네상스, 댕기), 지혜안(터치), 심 혜진(윙크), 천계영(윙크) 등이고, 두번째 경우는 최인선, 이진경, 조강 연, 이강주, 박희정, 나예리 등이다.


일상적 삶 노래하며 전성기 구가

이들 새로운 작가에 의해 창작되어지는 90년대의 순정만화는 80년대의 순 정만화와 또다른 90년대적인 새로움을 보여준다. 80년대 작가들이 집중했 던 거대한 서사 대신 일상적이고 가벼운 내용 속에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에서 페미니즘 만화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하고 포괄적인 영역 은 한 동아리로 묶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순정만화는 최초의 탄생시기였던 1950년대의 가족만화에서 1960년대의 소 녀취향만화, 그리고 80년대의 대작순정만화에서 90년대의 순정만화에 이 르기까지 정체돼있지 않고 발전하고 확산돼갔다. 순정만화의 미래에 대해 서 낙관할 수 있는 까닭은 순정만화가 당대에 상업적으로 히트한 작품의 모범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진보하며 발전해온 장르이기 때문이다. 순 정만화는 스스로 용어와 개념을 확산시켰으며 이를 통해 작품의 다양성과 독자의 다양화를 일구어냈다. 미래의 순정만화를 지금 짐작할 수는 없다. 더욱 다양한 장르분화를 통해 순정만화는 발전하고 좀더 더 많은 독자들 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언할 수 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한겨레21

여성들의 만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순정만화’는 낯선 경우가 많다. 특히 남성 독자들은 순정만화를 읽어본 예가 매우 드물다. 이같은 경향은 80년 대 이후 우리나라에 정착된 순정만화의 작가층과 독자층이 여성으로 구조 화되는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80년대 여성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장 을 연 순정만화는 여성 독자들에 의해 전폭적으로 수용됐기 때문에 남성 독자들과 멀어졌다. ‘순정만화=여성들의 만화’라는 인식은 남성독자들 의 접근을 봉쇄했고 오해를 가중시켰다. 여성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단정 적인 사고방식은 기존의 남성중심적 사고방식과 결합해 보지도 않은 순정 만화를 유치한 것, 왕자나 기다리는 로맨스 등으로 폄하시키고 고정관념 을 만들었다.

순정만화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 중의 하나는 순정만화 캐릭터들이 조형 미만 강조한 비현실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성의 구분이 불가능한 가 느다른 손과 발에 긴 머리를 휘날리는 순정만화의 캐릭터들은 순정만화의 비현실성을 증명하는 첫번째 항목이다. 그러나 이같은 특성은 만화의 특 성일 뿐이다. 만화의 캐릭터는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는 도상적 기호(iconic sign)다. 도상적 기호로서 만화는 현실 의 사물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단순화하거나 과장한다. 순정만화의 캐 릭터가 가느다른 손과 발에 긴 머리를 지닌 인물로 그려진 것은 순정만화 가 구조화한 도상일 뿐이다. 이것이 순정만화 작품성을 폄하하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순정만화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 중 두번째는 순정만화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순정만화의 주된 테마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은 순정만화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예술에서 다루어온 보편적인 주제다. 단지 이 이유만으로 순정만화 를 비난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었 느냐가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사랑을 다루었다 는 이유만으로 작품 전체가 폄하될 정당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순정 만화 속에 존재하는 많은 사랑은 작품의 완성도를 빛내며 독자에게 감동 을 준다. 유리핀 멤피스와 아델라이드의 사랑(<북해의 별>), 시이라젠느 와 레디온의 사랑(<별빛속에>), 샤르휘나와 에일레스의 사랑(<아르미안의 네딸들>), 마니와 해루의 사랑(<마니>) 등이 그러하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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