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추적

탈출, 탈출 더 갈 곳이 없다

(사진/국경에 나와 중국쪽을 바라보는 북한동포들.)

지난 7월 말 베이징 시내. 탈북자 박성식(30)씨는 한국대사관이 가까워지 자 발걸음이 엉거주춤해진다.

‘저곳으로 들어가야만 하나. 정말 이젠 이 방법밖에 없는 걸까.’

박씨의 손에 땀이 잡힌다. 남한으로의 귀순신청을 위해 이곳을 찾기까지 박씨와 부인 조순분(24)씨는 그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박 씨의 오른쪽 팔뚝을 잡고 있는 부인 조씨의 손에도 힘이 잔뜩 실려 있다. 역시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탈북 7개월, 생지옥의 연속

지난 1월 부인 조씨의 탈북 이후 두 사람의 중국생활은 생지옥 그 자체였 다. 탈북 뒤 벌써 7개월. 그동안 그들은 죽음 이외의 모든 고통은 다 겪 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죽음에의 유혹도 끝없이 이어졌다. 인신매매, 탈출, 내몽고로의 도피, 무보수 노동, 살해위협 그리고 또 탈출. 순간순 간이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남한행’이라는 마지막 탈출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박씨가 고개를 돌려 부인 조씨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조씨의 쌍꺼풀이 유난히 애처로워 보인다. 부인 조씨는 얼마 전 중국 무허가진료 사에게서 싼 값에 쌍꺼풀수술을 했다. 예뻐보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위 장용이다. 한때 조씨를 팔아넘겼던 인신매매범들이 도망친 그의 사진까지 들고다니며 찾는 통에 얼굴에 칼을 댄 것이었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조금 이나마 벗어나려고 한 것이기에 박씨에게 그 쌍꺼풀은 애처롭기만 했다. ‘살기 위해 이렇게 발버둥쳐왔는데, 이 마지막 ‘탈출’은 성공할 수 있 을까. 그리고 성공하더라도 이제 또다른 탈출의 위험은 없어질 것인가.’

박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탈출에서 탈출로’ 이어진 그 험난한 7개월을 더듬어본다.

지난 4월24일 박씨가 중국 길림성의 한 농촌마을에서 인신매매된 부인 조 씨를 구해냈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희망에 부풀었다. 순간일망정 모든 굴레에서 탈출한 듯했다. 사실 두 사람의 재회는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1월 북한을 떠난 부인 조씨는 4월까지 이미 여러 차례 이곳저곳에 팔린 상태였다. 함경북도 회령에 살던 조씨의 탈북이유는 “죽어가는 남 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남편 박씨는 96년 11월부터 올 1월 말까지 꼬 박 파라티푸스를 앓았다.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는 이 병은 특히 영 양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부인 조씨는 바로 이 남편에게 치 료비와 먹고 살 돈을 마련해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팔았던 것이다.

기적처럼 병에서 탈출한 박씨는 부인의 뒤를 따라 지난 3월 중국으로 탈 출했다. 그의 바람은 오로지 부인 조씨를 찾는 것이었다. 마침내 박씨는 부인 조씨가 팔려간 마을 입구까지 찾아갔고, 근처 밭에서 일하던 조씨와 극적인 해후를 이뤘다. 둘은 괭이 등을 들고 쫓아오는 마을사람들을 뒤로 한 채 대기해놓은 택시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물론 두 사람의 해후와 부 인의 구조는 조선족과 남한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밀입국자라는 ‘법적 지위’는 이들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굴레였다. 게다가 이번엔 돈을 날린 인신매매범들의 추적까지 받아야 했다.


조선족도 믿기 어렵다… 웬만하면 고발

어찌보면 탈북자에게 중국은 거대한 영토 전체가 감옥이다. 특히 연변과 동북3성은 위험하다. 이곳은 중국 공안(경찰)과 북한 특무(사회안전부 요 원), 그리고 조교(일본의 총련처럼 중국에 거주하는 북한 국적자)들이 촘 촘한 정보망을 형성하고 있다. 또 탈북자에 걸린 상금을 노리고 탈북 식 량난민들을 이들에게 신고하는 조선족 또한 적지 않다. 부인 조씨를 농촌 지역에 팔아먹은 자들도 조선족이 아니던가.

“박 선생님, 내몽고로 갑시다. 그 길밖에 없겠어요.”

탈출을 도왔던 조선족 최영석(42·가명)씨와 남한 민간단체 관계자는 지 루한 토론 끝에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내몽고는 중국의 오지 중 하나다. 그들이 내몽고를 피신처로 생각한 것은 고비사막이 대부분인 이 먼곳까지 북한 특무의 손길이 뻗치겠느냐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곳에도 조선족 마을이 있다니까 그곳에서 새삶을 꾸릴 수 있을 겁니 다.”

박씨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우선 박씨 부부는 내몽고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아니 사막이라니 그 삶은 또 얼마나 힘이 들까. 가는 도중 무 슨 일이 벌어지면…. 걱정이 꼬리를 물었지만 박씨 부부는 결국 내몽고행 에 동의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동북3성의 피 말리는 생활보다 나쁘지 야 않겠지.

“앉아서 죽느니 가봅시다.”

박씨 부부는 북한을 탈출할 때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말이 마지 막이기를 바랐다. 박씨 부부와 또다른 탈북자 이용식(28)씨, 그리고 ‘연 변의 쉰들러’ 3명이 동행한 지난 4월 말 내몽고행은 기차와 버스를 번갈 아 갈아타고 꼬박 이틀이 걸렸다.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박씨와 부인 조씨 는 손을 꼭 잡았다.

도착한 내몽고의 조선족 마을은 평화로워 보였다. 촌장을 비롯한 마을사 람들도 처음엔 “연변 조선족인데 이곳에 정착하러 왔다”는 박씨 일행의 말을 믿는 듯했다. 하지만 ‘비밀’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그날 저녁 벌어진 환영식을 겸한 술자리에서 사건이 터졌다. 문제의 발단은 같이 온 탈북자인 이용식씨였다. 술이 몇순배 돌 고 환영분위기가 무르익던 참에 이씨가 ‘폭탄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북조선에서 왔시오.”

언제 그렇게 마셨는지, 그는 이미 흠뻑 취해 있었다. 아무리 취중이라지 만 이씨가 왜 ‘탈북’ 이야기를 꺼냈을까. 쉰들러들이 이틀의 여행 동안 그렇게 누누이 비밀엄수를 당부했는데…. 분명히 술이 이씨에게 낯선 사 람들만 있는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부추겼을 터였다. 아니면 환영식장에 나온 음식들이 현재 북한에서 굶주리는 그의 부모를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씨의 말 한마디에 마을은 순식간에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변해버렸다 . 우호적이었던 촌장을 비롯해 마을사람들이 박씨 일행에게 당장 떠날 것 을 요구했다. 탈북자를 도우면 처벌된다는 소문이 이곳에까지 이미 퍼진 모양이다. “같은 민족끼리 그럴 수 있느냐”, “당신들 몇명 때문에 마 을 전체가 위험해질 수는 없다”는 등 거친 말들이 오고 갔다.

몸싸움으로까지 번질 뻔한 험악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것은 ‘돈’이었 다. 쉰들러들은 마을 촌장에게 이씨를 마을에서 떠나게 할 테니 박씨 부 부만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이들의 정착금조로 2만위안(약 2백만원) 을 내겠다는 제안이었다. 촌장이 이를 수락하면서 박씨 부부의 내몽고 생 활은 시작됐다.

그러나 내몽고가 마지막 탈출지이기를 바라던 박씨 부부의 희망은 이뤄지 지 않았다. 박씨 부부를 내몽고 조선족마을에 남겨두고 돌아온 지 채 3개 월도 안 된 지난 7월 중순 연변의 쉰들러들은 박씨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 았다.

“저희를 이 마을에서 좀 빼내주십시오. 마을사람들이 저희를 죽이려고 합니다. 우린 중국말도 모르고 돈도 없어 마을을 떠날 수가 없어요.”

박씨는 전화로 긴 얘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목소리도 다 급해 보였다. 환영모임 때의 일도 있어 이들은 곧 박씨 부부를 다른 곳으 로 옮기기로 했다.

“마을 앞 정류장까지는 나올 수 있다구요. 그럼 그곳에서 이틀 뒤 정오 에 봅시다.”

이틀 뒤 마을사람들의 눈을 피해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약속장소에 나 와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씨 부부는 연변의 쉰들러들이 도착하자 왈칵 눈 물을 쏟았다. 도착한 차에 곧바로 올라탄 뒤에도 부인 조씨의 눈물은 그 치지 않았다.


피난처 내몽고… 따돌림에 멸시까지

3개월간의 내몽고 조선족마을에서의 생활도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마을사 람들의 태도가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쉰들러들이 주고 간 정착금 탓인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날 이 갈수록 그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 바탕에는 멸시가 깔려 있었다.

“우리들은 노예였어요, 노예. 그들은 우리를 잠시 앉아 있을 시간이 없 을 정도로 머슴처럼 부렸어요.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겠다거나 신고해버리 겠다는 말은 예사였구요. 거지라도 그렇게 대하진 않았을 거예요.”

부인 조씨가 조금은 진정이 되는지 지난 3개월간의 생활을 털어놓았다. 남편 박씨는 계속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을 한 데 대한 대가를 제대로 준 것도 아니었구요. 그렇게 열심히 일 했는데 어떤 때는 밥도 제때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전화를 넣 은 건 마을사람들의 적대감이 이제 살인위협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그들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했던 게 위협의 원인이 됐죠.”

부인 조씨가 한차례 더 말을 한 뒤에야 남편 박씨가 서서히 입을 뗐다.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으니 정말 무서웁디다. 차라리 조선 특무와 인신매매범들이 판치는 연변이 나 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어요. 연변엔 적어도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곳에 달랑 우리 둘만 남아 있으니…. ”

박씨 부부와 연변의 쉰들러들이 다음 탈출구로 택한 곳은 선양의 조선족 김영수(40)씨 집이었다. 평소 탈북자들에게 온정적이었던 김씨는 지친 박 씨 부부를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었다. 박씨 부부는 될 수 있으면 방 바깥 으로 나오지 않으려 했다. 멀리 내몽고에서 선양까지 먼길을 ‘탈출’해 온 여독이 아직 남은 데다, 인신매매범이나 조선 특무가 어디서 튀어나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 동안 박씨 부부는 행복했다. 주인 김씨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 았지만 탈북 이후 계속 쫓겨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도 비로소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평화도 며칠 만에 깨졌다.

김씨의 집이 있는 골목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박씨 부부가 아무 리 눈에 띄지 않으려 해도 변소에 갈 때 등 마을사람들 눈에 안 띌 수는 없었다. 마을사람들이 김씨에게 박씨 부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질문에 대답이 궁했던 조선족 김씨는 박씨 부부를 ‘남한에 서 온 친척’이라고 소개했다. 처음엔 마을사람들이 박씨 부부를 동경어 린 눈초리로 바라봤다. 하지만 곧 마을사람들은 조선족 김씨에게 되묻기 시작한다.

“어째 한국사람이 관광은 안 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지.”

마을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박씨 부부와 조선족 김씨는 “아차!” 싶 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남한사람이 멀리 중국까지 와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 답한 말이 ‘연변에서 온 친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박씨 부부를 ‘남한 친 척’이라고 소개받은 이와 ‘연변 친척’이라고 소개받은 이들이 모여 수 군거렸다. 그리고 박씨 부부를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의혹의 눈 길이 가득해졌다.

“자, 자. 빨리 떠나야겠어요. 누군가 공안에 신고할 거라는 얘기가 들려 요.”

북한 특무와 끈이 닿는 조교들도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 의혹에 가득 찬 마을사람들 속에서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7월 말 조선족 김씨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박씨 부부에게 다급하게 재촉하기 시작했다. 박씨 부부도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4번째인지, 5번째인지 생 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마을을 탈출해야 했다.

이제 갈 때까지 다 갔다. 이젠 마지막이다. 그 벼랑 끝에 남한이 있었다. 베이징 한국대사관은 탈출구였다. 박씨는 감았던 눈을 떴지만 그러나 발 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는다.


베이징 한국대사관 앞, 발길을 돌렸다

박씨와 조씨는 남한사회가 풍요롭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들에게 ‘하늘 ’처럼 군림하던 일부 조선족들도 남한행이라면 껌뻑 죽는 모습을 보였었 다. 그들 조선족들에 따르면, 남한은 중국보다 20배나 많은 임금을 받는 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족들은 그렇게 남한으로 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 게다가 그곳은 어쨌거나 박씨에게도 ‘조국’이지 않은가.

하지만 또다른 이야기들은 박씨의 발걸음을 붙들어맸다. 남한행이 어려운 것은 조선족뿐만 아니라 탈북자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한 정부가 수많은 탈북자 중 ‘정보가치’가 있는 인물만 선별한다는 말도 있었다. 만일 한국대사관을 찾았다가 귀순이 허락되지 않으면 박씨 는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 될 것이다.

부인 조씨가 박씨의 소매를 당겼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는 신호다. 사 실 마냥 이렇게 길거리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리에서 지체 할수록 특무나 인신매매범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 이다. 박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그래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이건 생명을 건 마지막 도박인데 쉽게 결 정할 순 없지.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할 수 있는 시간도 그렇게 많진 않아 .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박씨 부부는 지금 쉰들러들의 도움으로 한 피난처에 몸을 숨기고 있다.)

연변 내몽고 선양 베이징=이상민/ 북한문제 전문 자유기고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8일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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