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삼성공화국 막아라”

(사진/채권단으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기아그룹 김선홍 회장.)

“삼성공화국을 막아라!”

삼성이 정부와 여권 핵심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기아를 인수하려 한다는 ‘의혹’에 맞서 현대, 대우그룹이 ‘현대-대우-기아 3자연합’이라는 ‘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현대, 대우는 지난 7월31일 기아그룹 경영악화 의 주범으로 꼽혀 온 기아특수강을 기아와 컨소시엄 형태로 공동경영하기 로 전격 합의했다. 또 현대산업개발을 통해 기산이 보유하고 있는 시가 1 천억원 대의 김포 장기리 아파트 부지를 사주거나 공동개발하기로 하는 등 계열사를 통한 지원에도 발벗고 나섰다.

“승용차 시장까지 빼앗길 순 없다”

이제 기아사태는 국내 재계순위 1위인 현대와 2위 삼성, 4위 대우라는 거 대 재벌그룹은 물론 정부와 정치권까지 망라된 거대세력간의 ‘파워게임 ’이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그동안 재벌그 룹들이 특정사안을 둘러싸고 합종연횡을 시도한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 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연간 매출규모 12조원의 거대 기업인 기아의 운명이 걸린 데다 그 처리방향에 따라 한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와 삼성, 현대, 대우 등 재벌그룹들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 서 각각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대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대, 대우는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는 것은 안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보 이고 있다. 대우 관계자는 “기아가 자력으로 회생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차선으로라도 기아가 삼성에 넘어가는 것 만은 막아야 한다”고 잘라 말 했다. 현대, 대우는 삼성이 기아를 인수할 경우 부동의 재계 정상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28개의 계열사(해외 현지법인 12개 제외) 를 거느리고 있는 기아그룹의 외형은 기아자동차의 6조6천억원을 포함해 모두 12조1440억원(96년말 기준). 지난해 60조원의 매출을 기록한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면 당장 70조원 대로 뛰어 오른다. 이는 지금까지 삼성과 치열한 1위 다툼을 벌여 온 현대(지난해 그룹 매출 68조원)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삼성의 기아인수는 그동안 삼성이 총력을 기울여 온 승용차사업에 활로를 뚫어주게 된다. 삼성으로서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현대, 대우는 국내 자동차 시장 1, 2 위 자리(승용차 내수시장 판매기준)마저 삼성에 위협받을 것이라는 위기 감을 느끼고 있다. 기아의 오랜 기술력과 막대한 생산설비를 통째로 삼킨 삼성이 엄청난 자금력과 계열사 지원을 동원할 경우 승용차시장에서 막강 한 경쟁력을 구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와 삼성은 기업윤리나 국민정서 상으로도 삼성의 기아 인수는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지난 94년 삼성의 승용차 진출이 자동차업체들의 설 비증설 경쟁을 촉발시킴으로서 결과적으로 자동차산업 전체의 부실과 구 조조정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원인 제공자인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고위 관계자는 “지난 93년 삼성의 기아주식 매집사건과 지난 6월 ‘한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 정이 불가피하다’는 삼성보고서 파문에서 드러나듯이 삼성은 기아 위기 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면서 “대다수 국민들과 기존 자동차업체들의 반 대에도 시장논리를 앞세워 승용차사업 진출을 강행한 삼성이 기아를 인수 한다면 한국 경제는 최소한 기업윤리조차 지켜지지 않는 약육강식의 정글 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여론 등 3자연합 호조건

국내 그룹들은 솔직히 삼성에 대해 일종의 공포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 삼성이 신규사업에 진출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해당 산업에 큰 파문 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주택건설업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뒤늦게 주택건설시장에 뛰어든 삼성이 주택수주물량을 무리하 게 늘리기 위해 재개발, 재건축 아파트 거주자들에게 제공하는 이주비 등 금융지원을 종래 가구당 5천만원선에서 1억원 이상으로 올려 놓았다”면 서 “주택건설업체들의 잇단 부도에는 건설시장의 부진과 함께 이런 삼성 의 행태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삼성의 가전사업 진출도 마찬가 지다. 삼성은 금성사가 50년대 말부터 어려운 여건 아래서 국내 가전시장 의 기초를 닦아 놓자 60년대 말 뒤늦게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사돈 관계인 럭키금성그룹(현 엘지그룹)과 우의를 상 하면서까지 내수시장보다는 수출에 주력하겠다는 약속을 내걸면서 가전시 장에 진출했다”면서 “여로 모로 승용차사업 진출 때와 상황이 유사하다 ”고 꼬집었다. 재계 관계자들은 삼성의 이런 행태를 무리한 ‘1등주의’ 가 가져온 결과로 해석한다. 현대 관계자는 “1등주의 자체를 비난할 수 는 없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기업을 죽이면서까지 최고가 되겠다는 왜곡된 1등주의는 큰 문제”라면서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려 한다는 의혹이 돌고 있는 승용차사업도 마찬가지 경우”라고 비판한다. 재계에서는 이러다가는 아예 “대한민국이 삼성공화국으로 되는 것 아니 냐”는 한탄을 한다. 현대, 대우 관계자들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삼성을 지원을 받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은데 삼성이 그동안 노려왔던 기 아마저 인수한다면 국민들 사이에는 ‘삼성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 능하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삼성의 기를 꺾어 놓지 못하면 앞으로 삼성의 영향력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지경을 맞게 될 것이라는 현대와 대우의 위기감이 물씬 묻어난다.

현대와 대우는 국민 여론 등 주변 여건도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범국민적으로 기아살리기 운동이 일어나고 기아인수 의혹을 받고 있는 삼 성에 대한 여론도 부정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대우가 잘 못하면 정부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현대-대우-기아 연 합 카드를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여건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재계 일부에서는 3자 연합을 권력 교체기=권력의 공백기라는 특수 한 상황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부담스런 정부·채권단, 한발짝 물러서

현대, 대우는 기아와의 연합이 기아가 제3자에 매각되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도 자신들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지렛대가 될 수 있을 것으 로 보고 있다. 기아차의 지분 구조상 기아 경영진이나 노조에 적대적인 M &A(인수합병)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기아 인수 시나리오의 장본인으로 꼽히고 있는 데 대해 억울하다 는 입장이다. 오히려 현대 등이 의도적으로 거짓 시나리오를 유포시키며 자신들을 음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시나리오설의 진 위와 관계없이 삼성이 기아인수의 가능성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은 누 가 봐도 뻔한 일 아니냐는 시각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대우-기아의 3자 연합은 삼성에게는 일대 타격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현대, 대우의 움직임이 없기 전까지 상황은 김선홍 회장 등 기아 최고경영진의 사표(물 론 당장 물러나라는 것은 아니라는 해명이지만)와 인원감축에 대한 노조 의 동의서 제출을 집요하게 요구한 채권단의 태도와 맞물려 제3자 인수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유력했다.

정부나 채권단으로서도 현대, 대우의 움직임은 예기치 않은 상황전개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채권단의 요구는 정부의 시각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 다.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정부 불개입=민간자율 처리 원칙표명과 함께 김 회장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나타냈다. 재경원 관계자는 “김 회장은 마치 정부와 삼성이 짜고 기아를 쓰러뜨리려는 것 처럼 음모설을 퍼뜨리고 있다”면서 “경영부실의 책임을 지고 있는 김 회장이 물러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 김 회장은 사실상 기아노조의 대리인”이라면서 “기아 부실의 큰 원인제 공자인 기아노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기아의 자구노력이나 제3자인수 모 두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 대우의 지원이 기아의 회 생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정부나 채권단으로서도 무조건 강경수단을 고수하기도 어려운 여건이 조성됐다. 채권단은 대표자회의를 두차례 연기하면서까지 김 회장의 사표 제출 등을 강하게 요구하고서도 끝내 지난 4일 회의에서 종전 입장을 고수한 기아와 김 회장에 대해 ‘부 도유예협약 인정 대신 운영자금지원 유보’ 결정을 내렸다. 이는 애초 초 강경수로 꼽힌 ‘부도유예협약 중단→부도→법정관리 신청→제3자인수’ 수순에 비하면 훨씬 완화된 것이다. 결국 정부와 채권단으로서는 국민들 에 이어 현대, 대우까지 지원하고 나선 마당에 당장 기아 부도를 내는 것 은 ‘삼성으로의 3자인수 추진 의혹’을 사실상 확인하는 셈이 되고 만다 는 부담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1만7천여 협력업체 부도 어떻게 막을까

그러나 기아사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아가 두달간의 부도유예 기간 중 강력한 자구책을 통해 회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현대, 대우에게도 말로만이 아닌 실 질적인 기아 지원의 의지를 확인시켜줘야 하는 부담이 남게 된다. 기아는 채권단의 자금지원은 불가능해졌지만 수출과 내수판매에 따른 자동차 할 부원금이 매달 6천억원씩 들어오고 있어 운영자금 조달에는 큰 문제가 없 을 것이라면서 오는 18일부터 출시되는 세피아Ⅱ(세피아 후속모델)의 판 매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은행들로부터 어음 할인이 안 되고 있는 1만7천여 협력업체들이 연쇄부도를 어떻게 막아내느냐의 문 제는 여전히 남는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