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갈매기 '각인효과'로 학습능력 확인

(사진/갈매기 아빠의 부정. 알 때부터 박시룡 교수의 목소리를 들어온 갈매기들은 박 교수의 목소리를 듣고 먹이를 받아 먹는다. 각인 효과는 새들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 )

초등학교 5학년 딸 하나를 둔 한국교원대 박시룡 교수(45·동물행동학)는 올 여름 일곱마리 새끼 갈매기에게 푹 빠져 있다. 갈매기 아빠가 됐기 때 문이다.

알에서 부터 자신의 목소리 들려줘

“갈- 갈- 갈-.” 박 교수가 외치자 태어난 지 두달 남짓한 새끼 갈매기 들은 헤엄과 미숙한 날갯짓으로 부리나케 그에게 달려온다. 순간 박 교수 도 저수지에 뛰어들었다. 수면 위로 목을 내밀고 또다시 “갈- 갈- 갈-” 하고 부르자, 갈매기들은 그가 쓴 모자의 차양을 물어뜯고 비벼댄다. 갈 매기들이 박 교수를 아버지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가 쓴 모자는 갈매기의 얼굴과 같은 흰색이고 차양은 부리의 색깔을 닮은 노란 색이다.

그렇지만 그가 갈매기 아빠가 된 것은 모자 때문만은 아니다. 박 교수는 지난 5월15일 수천마리의 괭이갈매기가 집단번식하고 있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 홍도에서 알을 가져왔다. 그의 보살핌 속에서 부화된 갈매기 새끼 들은 대학교 교정의 연못에서 살다가, 날기 직전에 이곳 충남 연기군 전 동면의 한 작은 저수지로 옮겨졌다.

박 교수는 이들이 알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마치 태교하듯 “갈- 갈- 갈- ”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각인 효과’로 그의 목소리에 학습이 된 것이다.

박 교수는 2년 전에도 인공 부화시킨 괭이갈매기 두 마리를 키웠다. 한 마리는 실제 어미의 목소리를 녹음해 들려주었고, 또 다른 한 마리에게는 그의 목소리를 학습시켰다. 녹음한 어미의 소리를 듣고 자란 갈매기는 금 세 도망쳤다. 그러나 나머지 한 마리는 매일 1백㎞나 떨어진 서해안으로 가서 놀다가도 저녁 때가 되면 교원대 교정으로 찾아와 아버지가 된 박 교수가 주는 먹이를 허겁지겁 먹었다. 안타깝게도 이 갈매기는 교정에서 자동차에 치어 그만 ‘식물 갈매기’가 돼 앓다가 죽어버렸다. 태어날 때 부터 학교 안의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리 등 소음에 학습이 돼 자동차가 와도 비키지 않고 버티다 그만 사고를 당한 것이다.

박 교수는 2년 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방학 이 되자 인적없는 산골의 저수지로 데려와 이들의 행동을 연구하고 있다.

괭이갈매기는 고기떼가 있는 곳에 잘 모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어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들은 배에서 버린 찌꺼기를 먹기 위해 어선의 뒤를 따라다닌다. 울 때 “야오, 야오”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서 괭이갈 매기라고 불린다.

비행법도 단계별로 학습

봄부터 여름에 걸쳐 괭이갈매기는 외딴섬에서 수천마리가 집단으로 번식 한다.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괭이갈매기 번식지는 어미가 제자식을 부르 는 소리와 엄마 찾는 새끼들의 소리로 장터처럼 소란스럽다. 특히 새끼는 3일 정도만 되면 혼자 걸어다녀 새끼가 서로 바뀔 염려가 생긴다. 그렇지 만 새끼들은 자기 어미의 목소리를 금방 익혔다가 신속하게 어미 목소리 에만 반응을 보인다.

“괭이갈매기는 살아남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어미 목소리를 배 워야 한다. 만일 이웃 어미 목소리가 나면 숨는다. 잘못 알아듣고 이웃 어미 앞에 나타났다가 물려죽는 잔인한 현장을 여러 번 목격했다.”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괭이갈매기 새끼들이 언제부터 제 어미 목소리를 알아듣는지 실험을 했다. 새끼가 인공부화로 태어나자마자 녹음기로 야외에서 녹음해온 어미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12마리 가운데 10마리는 3일 만에 제 어미 목소 리를 알아 찾아갔고, 두 마리는 4일째에 제 어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지금 저수지에서 기르고 있는 새끼 갈매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박 교수의 소리에 각인이 돼, 녹음한 어미의 소리를 들려주면 오히려 도망을 친다. 박 교수의 “갈-”소리만은 예외이다.

갈매기들의 아빠가 된 그는 매일매일 생활이 고달프다. 하루도 빠지지 않 고 새벽같이 저수지로 달려가 함께 놀다가 해가 져야 다시 집에 오는 생 활의 반복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갈매기들 사이에 13종의 말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갈매기들 사이에서는 자세를 낮추는 것이 중요한 예절이라는 것도 알아냈 다. 비행단계도 몇단계로 나뉜다. 처음에는 직선비행부터 하고 10m 이상 뜨지 못하지만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면서 고공비행과 수직비행을 배워가 고 있다.

그렇지만 새끼갈매기는 아직도 먹이 사냥법을 몰라, 끼니 때마다 갈매기 아빠가 물고기를 줘야 한다. 8월 말쯤 그는 새끼갈매기들을 서해안의 갈 매기 무리에 넣어줄 예정이다. 사람 아빠에게 학습된 갈매기가 다시 자 연으로 돌아가 적응할 수 있는지가 큰 관심거리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 정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박 교수는 “동물행동학은 서구에서도 귀족이나 하는 학문이었지만, 최근 에는 다른 학문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을 어떤 환경에 격리시켜놓고 실험할 수는 없지만 동물은 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도 넓어진다는 것이다 .

본능과 학습의 경계 모호 환경 중시해야

동물행동학에서는 어디까지가 본능이고 어디서부터가 학습인지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최근 들어 동물 세계에서도 학습요인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좋은 환경, 금실 좋은 부부 사이에서 자라는 어린 이와 그렇지 않고 매일 싸우기만 하는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심성도 달라질 뿐 아니라 나중에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동물행동학자가 주는 충고다.

각인 효과란

각인 효과는 지난 73년 노벨상을 탄 콘라드 로렌즈 박사가 밝혀냈다. 그 는 회색 기러기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 안에 스피커 장치를 한 뒤 끌고 다니면서 자신의 음성을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이 들은 자란 뒤에도 모형을 어미로 알고 따라다녔고, 나중에는 로렌즈 자신 이 동물의 어미가 됐다.

각인 효과는 새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지만, 최근에는 포유류와 어류 그리 고 곤충에서도 각인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어린 동물들은 처음으로 눈과 귀 그리고 촉각으로 경험하게 된 대상을 부모로 생각하고 따라다니게 된다. 오리는 생후 17시간까지가 가장 민감한 시기이고, 보통 새들은 생후 50일 동안 경험한 대상을 부모로 알고 쫓아다닌다.

신동호 기자/ 한겨레 생활과학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