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원리포트

스위스 은행 무릎꿇다

지난 7월23일 스위스 은행협회의 휴면계좌 공개조처가 이스라엘에 큰 반 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날 스위스은행들이 공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들어진 휴면계좌 1천8백72명의 명단, 액수로는 미화 4천2백만달러 어치다. 스위스의 고객 비밀주의 원칙이 유대인 단체와 국제적인 비난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지난 1월 ‘유니언뱅크 오브 스위스’의 경비원 크리스 토프 메일리(29)의 활약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이 은행이 유대 인 재산에 관련된 문서를 파기하려 문서뭉치들을 문서고에서 옮길 때 그 중 일부를 빼내 유대인 단체에 넘겼다. 이에 따라 이 은행은 결국 불법적 인 문서은폐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위협에 시달리던 메 일리는 결국 7월29일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번에 공개된 계좌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독일과 유럽 각국의 나 치 괴뢰정권 통치자 일부의 돈이 포함돼 있다. 유대인들로부터 강탈한 돈 ,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에 넘겨준 뒤 인원수대로 받은 돈과 아우슈비츠 등 나치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이 잡혀가기 전 예금해두었던 돈 등이 50년 만에 공개된 것이다.

이에 미국과 유럽은 물론 <예루살렘 포스트> <하아레츠> 등 이스라엘의 일간지들은 일제히 예금주의 당시 주소와 예금 청구방법 그리고 명단을 보도했다. 또 어네스트 앤드 영이라는 미국 광고대행회사가 텔아비브, 뉴 욕 등 5개 도시에 설치한 휴면계좌 정보센터에는 이날부터 매일 수천명의 연고자 문의가 잇따랐다.

한편 이번 공개를 계기로 서방 각국의 휴면계좌 공개는 계속 늘 전망이다 . 프랑스·영국·캐나다·노르웨이에선 이미 유대인 휴면계좌 조사에 들 어갔다. 또 스페인·포르투갈·터키·아르헨티나에선 나치 독일이 강탈해 간 유대인의 금괴에 대한 조사가 거론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이번 사건에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 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번 일로 “50년 만에 정의가 빛을 보았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진실 공개과정에서 스위스 등 관련국 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현재 스위스에서 는 반유대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표출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언론의 논조는 단호하다. 정의실현 에는 아픔과 희생, 그리고 필요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최영철 통신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