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핵 없는 지구, 자치단체로부터!

지난 7월20·21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르에서는 ‘핵없는 지구’를 꿈꾸는 아시아 사회운동가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번 세기 중에 핵을 없애자!” 란 슬로건을 내건 이 회의의 이름은 ‘비핵자치체대회’.

일본, 1백50곳서 비핵자치선언

‘비핵자치체’는 이번 대회에 참석한 일본을 비롯해 대만·필리핀·한국 ·미국의 3백여 활동가들이 꿈꾸는 ‘핵없는 지구’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 핵없는 지구는 두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첫번째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과 핵발전을 시행하는 나라들이 모두 합의해서 핵을 없애는 방식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제적 힘관계에서 볼 때 이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활동가들은 비핵자치체가 그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비핵자치체는 각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등으로 ‘핵 무기 및 핵발전의 금지’를 규정하는 운동이다. 이런 비핵자치단체가 전 세계 모든 자치단체로 확산된다고 가정해보자. 바로 ‘핵없는 지구’가 이뤄지는 순간이다.

지난 90년 첫대회 이후 이번으로 제5회를 맞는 대회는 첫날 각국 대표들 의 자국내 비핵자치체 활동 현황을 소개하는 데서 시작해, 둘쨋날 ‘동북 아시아의 비핵지대화’안을 마련하면서 끝났다. 대회 바로 다음날 삿포르 에서 계속 이어지는 ‘제9회 유엔군축회의’에 요청서를 전하기 위해서이 다.

2천1백곳으로 세계에서 제일 비핵자치단체가 많은 일본 대표들은 우선 그 간 일본에서 벌어져온 비핵자치단체운동의 사례를 설명하고 아시아 각국 에도 이런 운동이 활성화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또 필리핀 대표는 핵발전소 건설을 감행하려는 필리핀 정부를 비판했고, 미국 대표들은 오 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에 대한 연대감을 표시했다. 한국 대표로 참석 한 송학선 과천환경운동연합 대표는 올해초 과천시를 비핵자치단체로 만 들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노력을 소개했다(상자글 참조).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특히 흥미를 끈 것은 삿포르 시의회 의원들이 대회 준비부터 장소섭외까지 모든 것에 적극적 협조를 한 점이다. 일본 활동가 들은 이런 현상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직접 핵폭탄이 떨어진 경험이 있는 일본에서는 비핵자치체 선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분위기가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반핵시민단체들이 직접 시의원 후보를 내고 이들이 의회에 들어가 비핵자치단체 선언에 핵 심적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본 사회의 이런 분위기는 지 난 85년 시작된 비핵자치단체 선언의 연도별 추이를 살펴보면 쉽게 나타 난다. 일본 자치단체들은 지난 85년 5백33곳에서 ‘비핵선언’을 한 데 이어, 86년 2백53곳, 87년 1백50곳, 88년 1백80곳 등 꾸준히 비핵자치체 운동에 동참해왔다. 지난 95년에는 1백28곳이 이 운동에 동참했고 지난해 에는 32곳이 새로 가입했다.

정부 핵정책에 상당한 억지력

아시아의 비핵운동을 대표하는 ‘비핵자치체대회’는 유럽의 같은 취지의 조직 비핵지방정부회의(NFLA)와 함께 전세계 비핵자치체운동을 이끄는 두 개의 축으로 인식되고 있다. NFLA는 세계 최초의 비핵자치체 선언인 지난 82년 영국 맨체스터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맨체스터시는 ‘핵 에 의해 주민들의 생활과 복지가 파괴될 수는 없다’는 기본 이념을 정립 했다.

이후 지난 84년 첫회의를 가진 NFLA는 이후 비핵자치단체운동을 세계화하 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지난 89년 기준으로 세계의 비핵자치체를 살 펴보면 아르헨티나 9곳, 오스트레일리아 1백11곳, 벨기에 2백81곳, 영국 1백60곳, 캐나다 1백78곳, 네덜란드 1백곳, 프랑스 2곳, 스페인 4백곳, 미국 1백63곳 등이다. 현재 비핵선언을 한 도시 또는 마을은 전세계적으 로 모두 4천2백곳 정도로 추산된다. 지방자치제도가 뿌리내린 선진국의 경우 자치체의 비핵선언은 해당정부의 핵정책에 상당한 억지력이 되고 있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회의 둘쨋날에 제안된 동북아시아의 비핵지대화는 국가 중심의 안보 가 아닌 민중들이 주체가 된 안전보장을 확립하는 데 목적이 있다. 즉 안 보에서 두 개의 논점을 확립하자는 것이다. 그 하나는 ‘공통된 안전보장 ’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내가 안전한 만큼 상대방도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안보의 민주화이다. 결국 안보란 민중의 안전보장이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인류 를 몇 차례 멸망시키고도 남을 핵무기가 존재한다. “왜 이런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핵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핵을 배 치해야 한다고 답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게 대회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또 인종·지역차별이나 빈곤 또는 환경파괴가 핵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대회의 주요한 표어로 "핵과 전쟁 이 없는, 또 차별이나 빈곤이 없는 녹색의 별"이 제시된 것도 이 때문이 다. 이번 대회에서 송학선 대표가 “동북아의 비핵지대화를 달성하기 위 해서는 현재 북한이 겪고 있는 기아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출발해 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즉석에서 6만8천엔(약 54만원)의 기금이 걷 힌 것도 활동가들의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기금은 일본 활동가들이 북한에 직접 전달하기로 했다.

핵무기, 20세기에 없애진 못해도…

‘핵분열’이란 과학기술이 만들어진 지 60년 남짓, 아직까지 그 가공할 위협으로부터 인류는 자유롭지 않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투하로 대량학 살을 목격했던 인류이지만 핵강대국들이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 분으로 핵에너지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세 계에서 가동중인 약 4백20여기의 핵발전소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했다. 또 미·러가 핵탄두를 5분의1까지 삭감한다는 내용에 합의해 핵무기 감축 이 진행되고 선진국에서의 핵산업이 차츰 퇴조하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의 냉전구조 속에 축적된 상당량의 핵무기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개 도국을 중심으로 핵발전소 증설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세기중 에 핵을 없애자!”는 이번 대회 슬로건은 요원한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 만 삿포르의 하늘 아래서 아시아지역 활동가들은 그리 비관적이지 않았다 . 최근 몇년간 각국의 반핵·군축운동이 꾸준히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조인에 프랑스와 중국이 적극성을 보 였고, 역시 지난해 7월 ‘세계법정프로젝트’(ICJ)에서는 “핵무기의 위 협이나 사용은 일반적으로 위법”이라며 그 선제 사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는 권고적 의견을 냈다. 따라서 이번 대회 참석자들은 비핵자치체 활동이 “20세기에 핵무기를 없애지는 못해도 21세기를 위한 희망의 불빛은 심어 줄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삿포르=김현/과천환경운동연합 간사

비핵자치체, 과천의 첫걸음

대만핵폐기물의 북한반입이 사회여론화된 올해 초 과천 환경운동연합 등 과천 시민단체들은 과천시를 비핵자치단체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대 만핵 문제를 비롯한 각종 핵관련 사건에 ‘대증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전망을 내놓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과 천의 환경단체들은 ‘대만핵폐기물 북한반입 반대서명’과 함께 과천시를 비핵자치체로 만들자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서명은 시민 2천여명이 동참하는 등 큰 호응 속에 치러졌다. 과천에서 진행되었던 ‘비핵평화도 시선언’운동은 세계의 비핵자치체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지만 “핵무기, 핵발전소와 관련된 모든 물질의 생산, 반입, 저장, 수송을 금한다”라는 내용으로 근본지향적이라는 면에서 진일보한 내용이다.

과천은 핵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해 영광군수가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해 영광핵발전소 5,6호기 건설허가를 불허했다가 중 앙정부와 한전의 압력으로 결국 발표했던 내용을 번복했던 일이 있었다. 이는 자치체가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버 거운 일인지 입증한 사례이자, 한국에서도 비핵자치단체선언이 필요하다 는 것을 일깨워준 사건이다. 과천에서 진행되었던 비핵자치체운동의 경우 도 많은 수의 시의원들이 심정적인 공감을 표시했고 지난 6월 초 이 문제 를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지역 사안이 아니라는 점과 시에 서 많은 부담을 느껴온 것이 한계로 드러나면서 사안이 다음번 임시국회 로 넘어갔다.

현재 원자력진흥종합계획 내용의 뼈대는 2010년까지 모두 27기의 핵발전 소를 건설,운용할 계획이다. 또 동북아시아의 긴장이 완화될 기미가 보이 지 않는 한 핵위협이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비 핵자치체운동과 같은 풀뿌리 운동은 한국에서 이미 늦은 감이 들 정도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우 핵에너지의 문제는 전 아르 헨티나인들의 최대 현안은 아니었지만 전국 각지에서 핵 확산을 저지하려 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제기된 데 힘입어 지난해 10월10일 시헌법을 제정 해 비핵자치체임을 명백히 규정했다. 과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다른 자 치체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시와 같은 미래지향적인 결정이 필요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