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베트남 미국대사 돌 맞는다

최근 베트남 언론들은 최초의 주베트남 미국대사 더글러스 피터슨에게 집 중포화를 퍼붓고 있다. 무려 30년간이나 지속됐던 베트남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이 나라에서 피터슨 대사가 ‘고엽제 후유증 부 인’ 발언을 잇따라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언론들은 “그의 발언 은 총성이 멎은 지 20여년이 지나도록 아물지 못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실종미군 찾는 게 더 급하다”

피터슨 대사는 얼마 전 베트남의 영자신문 <베트남 인베스트먼트 리뷰>와 의 인터뷰에서 베트남전 당시 미국이 사용한 화학무기와 고엽제 피해자와 의 관련성 여부에 대해 “과학적 증거가 충분치 못하다”고 밝혔다. 사실 상 고엽제 후유증을 부인한 것이다. 대사의 이 ‘실망스러운 발언’은 전 쟁중 사용된 화학무기의 영향을 연구하고 있는 미 과학원 소속 국립의료 원 조사위에서 발표한 연구결과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조사위는 각종 역 학조사를 토대로 미군이 베트남전에 사용한 고엽제 ‘오렌지 에이전트’ 의 다이옥신 세제가 연조직 옥종암, 후두암 또는 폐암과 같은 각종 암을 비롯해 수많은 질병을 부를 수 있음을 밝혀낸 바 있다.

이에 베트남 언론들은 베트남 전범조사국 주충홍 국장의 말을 인용해 피 터슨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부충홍은 “국제연구기관의 조사 결 과에 따르면, 전쟁 당시 7천2백만ℓ의 화학약품이 베트남 전역에 살포되 었고, 그중 4천만ℓ 이상이 다이옥신제였다. 그리고 5만명 이상의 끔찍한 기형아가 태어났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느냐”고 목소리 를 높였다.

피터슨 대사의 ‘반베트남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지난 5 월9일 종전 이후 최초의 주베트남 대사로 부임하면서부터 베트남 언론에 ‘곱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왜냐하면 피터슨 대사는 당시 “1천5백89 명에 이르는 베트남전 실종미군(MIA)의 소재를 파악하는 게 미국의 최우 선적 과제”라는 말로 일성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95년 미-베 트남 실종미군 회담에서 허셀 고버 미 재향군인 담당부장관이 “베트남 정부의 실종미군 생사확인 노력에 만족감을 표시”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 룬다.

이때도 베트남 언론들은 실종미군 문제의 해결이 사실상 미-베트남 국교 수교의 전제가 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미 국교정상화가 이뤄지고 양국 간 대사를 교환하는 마당에 또다시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은 공인으 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대사가 자신의 개인적인 앙금을 표출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한 것이다. 피터슨 대사는 그 자신이 베트남전 포로출신이다.

한편 베트남 정부는 지난 95년 종전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전 희생자 숫자 를 공식발표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쟁으로 베트남 군인 및 민 간인 총 3백만명이 숨졌으며, 고엽제 등 화학무기로 인해 2백만명이 불구 자가 됐다고 한다. 보고서는 또 전쟁 당시 미군의 고엽제 사용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비난하고 현재까지도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2백만명이 넘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피터슨 대사는 이런 ‘공식발 표’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던진다. 그는 “본인은 그 누구도 이 수치가 전쟁중 사용된 무기와 관계있다고 단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 밝힌 것이다.

피터슨 대사의 잇따른 고엽제 피해부인 발언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미국 인들이 베트남전의 패배로부터 받은 자존심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20년 만에 베트남을 찾은 미국의 대사인 그에게 베트남인들이 “미국의 상처와 함께 베트남의 상처를 살피는 시각 을 갖춰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미군 25만명도 ‘고엽제 고통’

전쟁중 미군이 해방군이나 북베트남군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제초제를 사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느린 탄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고엽제는 지난 62년부터 10년간 베트남 전역에 뿌려졌다. 이로 인해 베트 남 전국토의 18%에 이르는 약 2백50만ha가 초토화됐다. 이 치명적인 제초 제의 최대 희생자는 물론 베트남인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오스트레 일리아·뉴질랜드·한국 등의 참전군인 가운데 10% 가량도 고엽제 후유증 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참전미군 총 수 2백50만명의 10%인 약 25만명이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보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고엽제 후유증이 2세들에게까지 이어진 다는 점이다. 베트남 언론의 피터슨 대사 공격은 “이런 상황에서 그의 발언은 천형을 받은 2세들에게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가져다 줄 것인 가”라는 항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호치민=구수정 통신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