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격동하는 재벌/한화그룹

한화그룹 “이제는 혁명적 개혁이다”

(사진/지난 7월 초에 열린 한화그룹 하반기 경영전략회의 한화 비서실은 이 자리에서 사업구조조정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적 개혁의 밑그림을 보고했다.)

“개혁을 넘어 참으로 혁명적인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적인 개혁만이 우리의 살 길이요, 나아갈 방향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혁명적’ 선언을 했다.


경향신문 1천4백26억원 적자

한화가 어느 정도의 위기에 처해 있길래 김 회장은 혁명적 개혁을 부르짖 고 나선 것일가. 위기상황이라면 그 근본은 무엇인가. 한화는 재계순위 9 위(자산 기준)로 계열사만 31개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엔 매출액이 처 음으로 10조원대에 올라서는 양적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수익면에서 성 적은 좋지 않았다. 적자가 무려 1천8백50억원에 이른 것이다. 30대 그룹 중에서 한진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규모다. 자금난을 견디다 못해 부도유 예협약 대상기업으로 지정된 채 사활의 기로에 서 있는 기아그룹보다도 많다. 경향신문이 1천4백26억원의 엄청난 적자를 낸 것을 결정적 이유로 꼽을 수 있지만 다른 주력기업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화종합화학이 유화경기 침체와 환율상승 등의 악조건 속에서 2백56억원의 적자를 냈고 (주)한화, 한화에너지는 흑자를 냈지만 그 규모가 1백억원대 안팎에 그쳤 다.

하지만 지난해 국내 기업들의 영업부진과 수익악화는 경기침체에 따른 일 반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대기업이라 해도 거의 예외가 없었다. 더욱이 올 들어 한화그룹 실적은 유화경기의 회복세에 힘입어 크게 개선되고 있 다. 올 상반기 매출실적은 5조4천4백억원으로 애초 목표 5조원을 넘어섰 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6%나 늘어났다. 수익면에서도 (주)한화, 한화에너지, 한화종합화학 등 3개사가 각각 1백억원 이상의 이익을 남겼 다. 연간 전체로 보면 3개사의 흑자가 1천억원을 넘을 전망이다. 그룹 전 체로는 경향신문의 적자를 감안하더라도 잘하면 작은 규모라도 흑자전환 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마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한화의 위기는 사라 진 것일까?

그러나 김 회장은 한화의 위기를 좀더 근본적인 곳에서 찾고 있다. 한국 경제의 위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경쟁 력의 발전단계로 볼 때 한국경제는 노동력, 자원 등에 의존하는 생산요소 단계를 벗어나 중화학, 자동차, 조선 등 장치산업이 중심이 되는 자본 단 계에 와 있다. 기술력으로 경쟁하는 테크놀로지 단계를 거쳐 미국 등 선 진국처럼 서비스산업이 중심이 되는 최종단계로 신속히 옮겨가지 않으면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불가능하다.” 한화그룹의 특징은 주력기업의 면 모에서 나타나듯이 화학 및 에너지 분야다. 전체 그룹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 한화 비서실의 이재무 전략기획 부장은 “화학, 에너지 등 장치산업만으로는 21세기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다”면 서 “당장 흑자를 내느냐 못 내느냐는 단기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 말한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선진국의 초우량기업의 예를 보더라도 사업구조조정은 거의 매년 이뤄진다. 회사의 매출이나 수익이 호조를 보 일 때 오히려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 장기적인 경쟁력과 수익성을 확 보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부실누적으로 한계점에 다다라 회사 존립이 위 태로울 때가 돼서야 뒤늦게 구조조정에 나서는 국내 기업들과는 전혀 다 른 모습이다.


“10년이나 버틸지 걱정스럽다”

김 회장은 조직 내부에도 위기의 씨앗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부터 시작된 한화종합금융 경영권 분쟁사태는 김 회장의 분노가 폭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김 회장은 연초 신년사에서 한화종금 사태를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라고 개탄하고 그 원인을 “조직 내부의 태만과 방만, 책임 회피와 전가 그리고 내부 결속 력의 미약”이라고 질타했다.

김 회장이 한화그룹의 개혁을 들고 나선 것은 몇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 다. 지난 92년에는 생산성 혁신, 사무혁신, 의식개혁에 중점을 둔 PRO-20 00 운동을 시작했다. 94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국제화 △핵심역량 강화 △인사제도 개혁 △기업문화 개혁 △통합화·복합화 등을 골자로 한 ‘제 3의 개혁’을 주창했다. 95년 3월에는 그룹을 △화학·에너지 △화약·무 역·통신 △기계 △유통·레저 △금융 등 5개 소그룹 체제로 전환하고 오 는 98년까지 계열사 통폐합이나 매각을 통해 계열사 수를 25개(당시 기준 )에서 13개로 줄이기로 했다. 또 (주)한화를 통해 건설 및 제약사업에 새 로 뛰어들었다. 지난해 1월에는 정보통신을 중점육성사업으로, 석유화학 및 에너지를 주력사업으로, 금융 및 무역을 국제화지원사업으로, 유통 및 레저를 시장대응형사업으로 각각 설정해 그룹을 21세기 초우량기업으로 발전시킨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반도체와 위성방송, 위성통신사업을 그룹 신규전략사업으로 선정하는 중장기 신규사업진출계 획을 발표했다. 인사제도에서도 계열사별로 특별상여금을 차등지급하는 그룹사 평가제를 시행하고 부장급을 시작으로 연봉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 15주년 기념사를 통해 “이러다가는 모 두가 망한다. 지금 상태라면 10년을 버텨낼지 걱정스럽다”는 충격적 발 언을 했다. 그는 이어 “제3의 개혁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김 회장이 신년사에서 외친 ‘혁명적 개혁’은 그동안 추진돼온 개혁작업의 실패에 대한 위기의식의 결정판인 셈이다.


10월 전후로 청사진 발표될 듯

한화그룹 비서실은 지난 7월8일 그룹 하반기 경영전략회의에서 김 회장과 그룹 계열사 사장단에게 혁명적 개혁의 밑그림을 보고했다. 혁명적 개혁 의 핵심은 사업구조조정이다. 그룹의 중심축을 장치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옮기는 것이다. 한화가 21세기에 그룹 성장을 주도할 새로운 사 업으로 꼽고 있는 것은 정보통신과 전자·반도체, 의약·생명공학 등 세 가지. 이는 한화가 지난 96년부터 단발적으로 시도했던 구조조정과 신규 투자계획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다. 정보통신의 경우 (주)한화와 한텔을 통해 벌이고 있는 교환기, 발신전용휴대전화 단말기 등 기기제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 위성통신 사업, 차세대이동통 신 사업 등 서비스분야로 적극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전자·반도체에서는 화합물반도체와 2차전지, 평판디스플레이 같은 산업부품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의학, 생명공학은 투자금액이 막대하고 상용화 기간이 10년 이 상 걸리면서도 성공률이 낮은 점을 고려해 중간개발 이상의 단계에 있는 품목을 선정한 뒤 자본참여나 라이선스 계약, 전략적 제휴 등을 맺는 방 식을 유력하게 강구중이다. 한화는 이들 신규사업 성공을 위해서는 미국 실리콘밸리 등 전세계적으로 광범하게 분포해 있는 테크놀로지 센터를 효 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 여부가 열쇠라고 보고 전세계적인 기술 네트 워크를 구축할 방침이다. 매각설이 끊이지 않는 경향신문에 대해서는 경 영개선을 위해 강도높은 자구책을 강구중이다.

한화는 비서실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계열사와의 조율을 거쳐 확정한 뒤 1 0월부터는 시행에 들어갈 계획이다. 김 회장은 하반기 경영전략회의에서 “9월 말까지는 최종안을 확정하라”고 아예 시한을 못박았다. 김 회장은 또 “만약 밥그릇을 챙기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직위를 막론하고 과감히 정리할 것”이라며 최종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돌출할 수 있는 각 계열 사별 이기주의에 대해 미리 쐐기를 박았다. 한화는 사업구조조정과 신규 사업이 계획대로 이행될 경우 2000년 초 이후 시점에는 현재 그룹 매출의 10%에도 못미치고 있는 기술집약적 산업 비중이 절반 이상으로 높아질 것 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화는 오는 10월 창립 45주년을 맞는다. 혁명적 개혁의 청사진은 이때를 전후해 발표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화학, 에너지, 유통, 레저기업으 로만 여겨져온 한화가 창립 반세기를 맞는 2000년 초에는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될지 주목된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14일 제 170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