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주장

매국노에 대한 사면인가

“과거사에 대해 지나친 정의관념이나 민족감정을 내세워 문제삼는 것은 오히려 사회질서에 어긋난다.”

어느 평범한 시민의 발언이 아니고 사법부의 판결문이다. 그것도 매국노 이완용의 증손자에게 시가 30억여원대의 땅을 돌려줄 것을 명령하면서 내 린 판결문의 내용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과거사’를 따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왔다. 지난 일을 따지는 것보다 현실과 미래가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이 다. 그래서 ‘미래지향’이란 말이 요즘에도 시세를 탄다. 따지고 보면 사법부만 탓할 일도 아니다. 14대 국회에서 전개됐던 제2의 특별법 제정 이 흐지부지되면서 오늘의 사태는 충분히 예견됐던 것이다. ‘실정법’ 안에서 판결하는 법관들에게야 과거사의 정의관념이나 민족감정 따위는 울타리 밖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책임성과 역사의식이 없기는 대통령과 정부가 으뜸이다. 군사정부는 또 그렇다치고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는 어떤가. 군사반란과 양 민학살자를 처벌하기 위해 위헌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소급입법으로 쿠데 타 세력을 단죄하였다.

이런 정부 여당이 매국노 재산을 환수하는 특별법 제정을 외면하고 마침 내 사법부는 실정법 만능의 법정신에서 매국노 재산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가 ‘인간의 길’로 미화되며 그 추종세력이 날 로 늘고, 친일파 후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에서 이완용이나 송병준 후손들이라고 나서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최근 일부 중고등학생들이 일진회라는 폭력조직을 만들어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민족정기가 살아 있고 역사교육이 바로 되어 있었다면 아무리 철부지들이라 해도 매국의 선봉단체였던 일진회의 이름을 함부로 쓸 수가 있었겠는가.

과거사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없는 미래지향은 추악한 과거사를 되풀이 할 개연성을 잉태한다. 국회와 정부여당은 하루속히 제2특별법을 제정하 여 매국노 자손들이 더이상 조상땅 찾기에 나서는 따위의 역사를 짓밟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이것은 미래를 향한 정치개혁과 함께 서둘러야 할 국가적 과제인 것이다.

김삼웅/친일문제연구소장

국익과 인권은 모순개념 아니다

얼마 전 독일의 헌법재판소에서는 ‘국익보다 개인의 인권이 우선’이라 는 판결을 내렸다고 전한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 소식이었다. 개성 인권 창의성 도전성 등의 어휘보다 공동체 집단 조직 협동 등의 낱말에 더 친숙한 우리 사회의 정서로 보아 쉽게 납득하기 힘 든 사실이기도 했다.

이같은 독일 헌재의 결정에 따라, 베를린 장벽을 뛰어넘는 동독 국민을 살상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당수의 말단 사병들이 중형을 받게 됐 다고 한다. 직속 상관의 위협적인 발포명령에 따랐을 뿐인 이 병사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우리로서는 당연히 피해자의 범주에서 사고할 것이다. 국가의 명령에 따 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헌재의 눈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가해 자일 뿐이다.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할 수 없다. 국가의 강제적인 명령 때문이었다 해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공공연한 상식마저도 국가기밀의 범주에 넣 어 체포와구금을 강행(<한겨레21>168호 초점)한다. 국가 이익은 개인의 인권과 권익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나고 시대는 바뀌었는데, 아 직도 통치 수단은 제자리에 멈춰 있다.

일률적 조직적 통일적 사고와 행동을 바라는 통치권과 비판적 진보적 도 전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국민 사이에는 아직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 다. 바로 독일 헌재가 고심했던 ‘인권’이냐 ‘국익’이냐의 문제에 대 한 판단이다. 그러나 아직 이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국가 이익을 내세우면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 그럴 때 국익이 무슨 소용 인가. 그 반대상황도 마찬가지다. 발상의 전환 없이 이 벽을 넘을 수는 없다.

관점과 시각이 교정되면, 국가보안법을 페지하거나 개정할 수 있다. 국민 의 권리를 무시하고 침해하는 모든 조항을 삭제하거나 용도폐기하고 나면 ,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애국심’의 발현을 보게 될 것이다.

김재홍/ 울산 북구 상안동 358-1 쌍용아진아파트 103-108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