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문화

무더운 여름, 색깔있는 비디오 여행으로 날려버리자

덥다. 휴가는 벌써 갔다 왔고, 이제 낙이 없다. 이럴 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비디오다. 카메라 워킹이 어떻고, 미장센이 어떻고 따위를 떠드 는 평론가들의 말에 속아 머리에 쥐나는 영화로 귀한 휴가를 망칠 필요는 없겠지만, 신프로 부스에서 한 걸음 비켜 한 감독, 또는 한 배우의 작품 을 이번 기회에 섭렵해 보는 건 어떨까?


왕가위

요즘 왕가위 모르면 어디 끼지도 못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자 른 한국 ‘왕가위’들 때문에 왕가위는 더 유명해졌다. 왕가위 영화는 &l t열혈남아>(1988), <아비정전>(1991), <동사서독>(1994), <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등 다섯 편.

크게 히트한 건 없다. 왕가위 신드롬을 낳은 <중경삼림>의 극장관객 이 17만, <타락천사>가 9만명 정도였다. 액션 누아르로 광고한 <아 비정전> 개봉 땐 환불소동을 일으킨 관객들 돌팔매에 극장 유리문이 깨 졌다. 하지만 왕가위 영화는 잘난 척하는 마니아들만 보는 그런 영화는 분명 아니다. 영화는 도시인의 허무, 고독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데 잔상 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아비정전>에서 ‘발없는 새’ 아비(장국영)가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 니를 만나지 못한 채 뒤돌아 나오는 그 걸음에서 묻어나는 고독, <중경 삼림>에서 몸에 착 달라붙는 에스프리 티셔츠에 <캘리포니아 드리밍& gt을 틀어놓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스낵코너를 대걸레 하나로 누비는 왕정문(그는 원래 가수다)의 상큼함, <타락천사>의 아름다운 킬러 등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표출하지만 그 뒷모습엔 ‘외로 움’이란 똑같은 글귀를 달고 있다.

<아비정전>의 롱테이크, <동사서독>의 고감도 필름, <중경삼림 >의 스텝프린팅, <타락천사>의 광각렌즈 등 그의 촬영기법 또한 눈 부시다. 여기에 장국영의 맘보댄스로 유명한 <아비정전>의 <Maria Elena>, <중경삼림>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크렌베리스의 &l t드림스>를 리메이크한 왕정문의 <몽중인>(夢中人) 등 영화 속 음 악은 그 영화 자체다. 몇번씩 보는 사람도 많은데, 한번쯤은 꼭 볼만한 영화들이다.

58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왕가위는 문화혁명 직전인 5세 때 어머니와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누나가 뒤를 따르지 못해 졸지에 이 산가족이 돼버렸다. 자신의 영화를 낭만적이고 밝은 영화라고 하지만, 영 화마다 쓸쓸함이 배어나는 이유는 유년의 그 슬픈 경험 때문일 지도.


장선우

부시시한 머리, 잔뜩 찌푸린 얼굴, 언제나 공사판 인부 같은 모습의 장선 우 감독은 한때 민주화 운동 전선에 서기도 했고, 마당극을 하기도 했다. 이런 민중주의적 경험과 그의 영화는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다. <꽃잎&g t과 최근의 <나쁜 영화>에서처럼 때로 우린 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 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의 영화는 <서울예수>(1987), <성공시대>(1988), <우묵배미 의 사랑>(1990), <경마장 가는 길>(1991), <화엄경>(1993), &l t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꽃잎>(1996), 그리고 개봉중인 < 나쁜 영화> 등.

설핏 봐도 영화의 종횡은 무척이나 넓다. <성공시대>는 자본의 자기 증식 논리와 이 속에 휘말린 인간을, <경마장 가는 길>은 허구적 가 치를 추구하는 두 남녀를, 고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화엄경>은 어 머니를 찾아다니는 어린 선재의 ‘만남’ 그 자체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광주항쟁과 이정현의 빼어난 연기로 기억되는 <꽃잎>과, 포르노그라 피를 표방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있다.

‘장선우는 실제 이상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 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무언가 메시지 를 던지려 한다. 예술영화를 찍는 고고한 인물은 아니지만 아나키스트적 반항이 때론 관객을 향하기도 한다.


뤽 베송

수입사의 영화 가위질로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운 뤽 베송은 오만하다. 도 대체 ‘지가 얼마나 잘 났기에’ 그런지 한번 보자. <서브웨이>(1985 ), <그랑부르>(1988), <니키타>(1990), <아틀란티스>(1991), <레옹>(1994), 그리고 개봉중인 <제5원소>. 그의 영화는 일반적 인 프랑스 영화와는 다르다. 할리우드에 더 가깝다. 여기에 어린 시절 지 중해 경험이 묘하게 섞여 독특한 향을 발산한다. <니키타>와 <레옹 >은 프랑스, 미국, 홍콩영화 짜깁기다. 그러나 강렬하다. 그의 영화 중 심은 이야기나 내용이 아닌 형식이고, 이미지다. 레옹, 니키타 류의 액션 영화가 어디 한둘이었을까마는 그래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니키타, 레 옹, 마틸다의 그 강렬한 캐릭터와 소품 하나에까지 존재의 의미를 추구한 그의 꼼꼼함 덕분이다.

그의 영화의 또다른 한 축은 바다다. 그의 아버지는 잠수부였고, 그는 어 린 시절 그리스 바다에서 성장했다. 짙푸른 영상 때문에 극의 이야기와 구성이 뒷전으로 밀리지만 올여름 바다 구경을 못한 이라면 <그랑부르& gt가 그만이다. 결론, 그의 특징은 거리낄 것 없는 자기표현의 과감함. 그래서 그는 실제보다 더 커보인다.


데이비드 린치

국내에 컬트영화란 말이 알려진 건 92년 TV에 <트윈픽스>가 방영되면 서부터다. 음산한 분위기와 기괴한 인간군상들. 워싱턴 윈드강에 10대 소 녀 로라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얽힌 추악한 음모들 이 밝혀진다. 영화로도 개봉됐지만 15부작이 그의 진수다.

그의 영화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는 가족의 단란함과 가정의 편안함이라는 미국 사회의 신화에 침을 뱉는다. <트윈픽스>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딸 성폭행처럼 성적인 억압과 정신병적 징후가 나타나는 미국 가정의 모 습을 보여주는 그의 악몽은 자학적 쾌감을 안겨준다. <이레이저 헤드&g t(1978), <블루 벨벳>(1986), <광란의 사랑>(1990), <트윈픽스 >(1992), 그리고 얼마전 <로스트 하이웨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 화에는 광기가 번뜩인다.

<이레이저 헤드>는 환상과 강박관념이 가득한 흑백영화다. 줄거리는 의미없다. 구토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식사전후에는 삼가야 한다. 재미 없고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루함을 불러일으키는 그 요소 때문에 이 영화는 컬트영화 원조 자리를 차지했다.

<블루 벨벳>은 잘려진 사람의 귀가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성도착증 악당, 기형적 주변 인물, 낭만적 컨트리송마저 절망스럽게 들린 다. 변태 성욕자로 클럽 여가수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프랭크는 그를 구하 기 위해 뛰어든 제프리에게 말한다. “너도 나와 다르지 않아.” 관객 모 두에게 하는 말이다. <광란의 사랑>은 90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작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 이미지들을 특유의 영상기법으로 관객 뇌리 속에 침투시켜 강하게 린치를 가한다. 그는 어린시절 필라델피아 공업지대에서 소음이 들려오는 공장같이 넓고 음산한 집에서 살았다. 절망, 폭력, 공포 , 부조리 등 그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특징들은 그의 일생을 통한 암울 한 삶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그의 영화에 열광하는 팬이 많은 건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암울하기 때문은 아닌지.


리들리 스콧

복제양 ‘돌리’로 복제인간 이야기가 한창이었을 때 가장 빈번히 차용된 게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다. <블레이드 러너>는 스필버그의 <E.T>와 거의 동시에 미국에서 개봉됐다. 결과는 참패. 동화 같은 환상에 비해 해리슨 포드 주연의 <블레이드 러너>는 너무 암울했다. 사람들은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를 택했다. 하지만 이 영 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진가를 인정받아 뉴욕의 소극장에서 고정적으로 상 영되는 컬트의 고전이 됐다. 2019년 3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검은 산 성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기계 복제인간을 제거 하는 임무를 띤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 그리고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 고 믿고 있는 레이첼. 후기 산업사회의 미래를 그린 <블레이드 러너>는 디스토피아적 공간 안의 존재를 리얼하게 그려낸 화면이 90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리들리 스콧은 이 외에도 <에일리언>(1979), <위험한 여인>(1987), <블랙 레인>(1989), <델 마와 루이스>(1991), <1492 콜럼버스>(1992) 등을 내놓았다. <에일리언> 은 SF와 공포영화 장르에선 최고 수준이다. 우주선은 자본주의에 희생되 는 특징적 공간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습격하는 괴물은 자본주의 적 억압의 투사체다. <델마와 루이스>는 가부장제 사회에 등을 돌리고 다 른 세상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나는 여성들 이야기다. 고전적 서부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겪는 여정과 비슷하다. 영웅적 최후까지. 마치 <내일을 향 해 쏴라>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마지막처럼. 그의 영화는 그 장 르가 SF, 여성, 역사, 스릴러 등 다양하게 바뀌더라도 자본주의 구조의 비인간화를 근저에 깔고 있다.


찰리 채플린

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윗도리, 작은 중산모에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팔자걸음, 옆구리엔 지팡이 하나. 영원한 배가본드(방랑 자) 찰리 채플린이다.

그는 1889년 런던에서 태어나 77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12세 때 극단 아역배우를 시작으로 유리공, 이발사, 팬터마임 배우 등을 전전했으며, 4 번 결혼했다. 1910년 미국에 발을 디딘 그는 할리우드의 빨갱이 사냥으로 1952년 추방당하기도 했다. 평생 81편의 작품에 관여했고, 70여편에서 감 독과 주연을 맡았다. <키드>(1920), <황금광시대>(1925), <서커스> (1928) , <씨티라이트>(1931), <모던타임스>(1936), <독재자>(1940), <살인시대<(1947), <라임라이트>(1952) 등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찰리는 ‘바바바밤, 밤밤밤∼’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거리를 걷지만 그 는 생존과 사랑을 위해 잠시도 쉴 틈이 없다. 분투는 눈물겹도록 우습지 만, 모든 희극적 상황은 또한 페이소스를 예비하고 있다.

<키드>에선 고아소년과 찰리의 귀여운 사기극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마 지막 장면에서 찰리와 헤어지지 않으려 바둥거리는 소년의 울부짖음은 지 금봐도 가슴이 아파온다. <황금광 시대>는 황금을 좇아 부나비처럼 헤매 는 인간들을 그린 흑백사진이고, <시티 라이트>는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 은 도시의 쓸쓸한 풍경이다. <시티 라이트>의 배꼽잡는 권투장면은 지금 도 많은 코미디에서 차용되고 있다. <모던 타임스>에선 슬랩스틱 제스처 로 기계만능의 현대를 풍자한다. 대중사회에서 소멸되어 가는 인간성에 대한 고발과 물질문명이 가져온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인데 그 비판은 지 금도 유효하다. 그의 영화는 언뜻 좌파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 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선 따뜻한 휴머니즘이 먼저 느껴진다. 신 파가 물씬거리는 <라임라이트>는 더욱 그러하다.


브래드 피트

브래드 피트는 지금 오스트리아 출신 스키 챔피언 헨리치 해러를 다룬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티베트에서의 7년간>을 찍고 있다. 장 자크 아노가 처 음 브래드 피트의 캐스팅을 언급했을 때 주변에선 모두 어려울 거라 했다 . 이미 최고 자리에 오른 그가 뭣 때문에 1년 가까이 산자락을 헤매는 힘 든 일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브래드 피트는 쾌히 수락했다. 그리 고 오는 10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의 한 단면이다.

그는 폼만 잡는 미남에 그치기를 원치 않는다. 그에게서 우린 제임스 딘 을 더듬지만, 제임스 딘과는 분명 다르다. 그는 반항의 기초 위에 섹시함 , 퇴폐, 냉혈한, 파시스트, 악마주의 등 온갖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띄고 있다.

대학(신문광고학과)을 졸업하기 두 달 전인 24세 때 그는 영화배우가 되 려고 고향인 미주리를 떠나 LA로 향했다. LA의 첫날밤은 닛산 자동차 안. 그는 냉장고 옮기는 일, 스트립쇼단 운전사, 레스토랑 웨이터로 일했다. 그리고 89년 <해피 투게더>(1989)에서 단역으로 데뷔했다. <델마와 루이 스><1991)에선 델마(지나 데이비스)를 유혹하는 야비하고 섹시한 히치하 이커로, <칼리포니아>에선 연쇄 살인마로 나왔다. <트루 로맨스>(1994)에 서도 그는 마약을 피우며 하루종일 소파에서 뒹구는 역을 맡았는데, 그의 출연은 5분 정도지만 나머지 1시간 54분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다. <뱀파 이어와의 인터뷰>(1994)에선 주인공 톰 크루즈를 완전히 가려버렸고. <흐 르는 강물처럼>에서 그는 가족문제로 고민하는 청년이었는데, 플라이 낚 시를 드리운 쓸쓸한 뒷모습과 기자로 나와 큰 생맥주 잔에 양주잔을 집어 넣어 홀짝 들이키는 폭탄주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가을의 전설>(1994), 일단 경치 끝내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치렁치 렁한 블론드 머리칼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평원 저 멀리에서 나타난다. 야성미를 풍기면서도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눈빛으로 여성팬들의 마 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렸다. 브래드 피트 스타만들기 때문에 내용전개 가 너무 뻔하게 흐르고 백인 우월주의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러려니 하 자. <쎄븐>(1995)에선 <가을의 전설>에서의 완벽성을 조금 떨어뜨렸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인간미가 느껴지고, 그의 연기는 더욱 섬세해졌다. 이 외에도 <12몽키스>(1996), <데블스 오운>(1997), <슬리퍼스>(1997) 등 그 의 영화와 연기는 점차 윤택해지고 있다.


위노나 라이더

최근 국내 한 영화잡지 인기조사에서 위노나 라이더는 장기집권하던 멕 라이언을 거꾸러뜨리고 ‘외국 여자배우’ 1위에 등극했다. 할리우드에서 이미 최고 여배우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그의 겉모습은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위노나는 역에 따라 연기와 분위기는 물론 아예 얼굴모습마 저 바꿔버리는 탁월한 변신에 능하다. 그래서 위노나 쫓아가기는 흥미있 는 여행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얼마나 예쁜가?

위노나의 부모들은 60년대 히피였고 그가 어린 시절의 감수성을 키운 곳 은 캘리포니아 오지였다. 71년생인 그는 15세 때인 86년부터 영화에 출연 했다. 너무나 앳된 모습을 볼 수 있는 데뷔작 <루카스>(1986)를 비롯, 팀 버튼의 <유령수업>(1988·원제 비틀주스), <가위손>(1990), 청소년 코미 디물 <헤더스>(1989), <열정의 록큰롤>(1989), 프란시스 코폴라의 <드라 큘라>(1992), 그리고 <순수의 시대>(1993), <영혼의 집>(1993), <청춘스 케치>(1994), <작은 아씨들>(1994), <아메리칸 퀼트>(1995) 등. 위노나는 특히 청춘영화와 여성영화(순정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아메리칸 퀼트> 에선 결혼을 앞두고 불안과 기대로 흔들리는 젊은 여성 핀으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는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먼을 유혹했던 앤 밴크로프트가 ‘할 머니의 언니’로 등장한다. 위노나는 한마디로 상대 남자 배우의 후광 없 이도 든든히 영화를 지킬 수 있는 파워를 지닌 여배우다. 이런 점에서 그 는 멕 라이언이나 샤론 스톤과는 구별된다. 조디 포스터나 지나 데이비스 류라고나 할까? 이미 최고지만, 그는 앞으로도 더욱 뻗어나갈 것 같다.


주윤발

긴 바바리코트, 검은 선글라스,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으며, 달러에 불 을 붙여 담배를 피우는 사나이. 슬로모션으로 쌍권총에 불을 뿜으며 악을 응징하는 영웅. 주윤발이었다. 그는 우울한 80년대 말 우리의 위안이었다 . 홍콩 누아르는 그의 총부리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홍콩 배우들 대부 분이 그러하듯 마구잡이 출연 탓에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그 리고 이젠 여명, 양조위, 곽부성, 금성무 등 차세대 스타들에 의해 이 아 저씨는 완전히 찬밥이다. 최근 미국진출을 시도하는 그의 재기를 바라며, 전성기 작품 중 스쳐 지나갔던 것, 또는 그때 열광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꺼내보자.

주윤발은 역시 <영웅본색>(1986)이다. 다리를 절뚝이며 깡패들이 길바닥 에 내던지는 돈을 집어들고, 꾸역꾸역 밥을 먹는 소마(주윤발)의 처량한 모습은 영웅으로 복귀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이긴 하지만 가슴이 아린다. 그때 감옥에서 막 나온 친구 적룡이 중국어 특유의 감성적 발음으로 “소 마”하고 부르자, 입에 밥을 가득 담은 채 친구를 쳐다보던 주윤발의 눈 빛에서 읽혀지는 남자들의 우정이란. 주제가 또한 가슴을 파고든다. <영웅본색2>는 외인구단 분위기를 풍긴다. 적들의 의심 을 가시게 하기 위해 일부러 형(적룡)에게 자신을 쏠 것을 요청하는 동생 (장국영), 마지막 숨을 거두며 전화박스에서 아내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 어주며 스러지는 장국영, 비장미는 1편보다 더하다.

주윤발의 홍콩 누아르는 <첩혈쌍웅>(1989)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홍콩 반환의 불안, 아시아의 센티멘탈리즘, 환상주의 등 오우삼은 단 한 편의 영화 속에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고 주윤발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이외에 주윤발의 누아르 작품 중 볼만한 것은 <영웅투 혼>(1987), <감옥풍운>(1987), <타이거맨>(1989), <첩혈속집>(1991) 등이 다.

주윤발은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물에도 출연했는데 대부분 수준 이하다. 하지만 종초홍과 함께한 <가을날의 동화>(1987)는 깔끔한 수채화 화면과 잔잔한 스토리 전개로 가슴에 작은 여운을 남겨둔다. 종초홍이 부른 동요 를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비운의 오토바이 경주자로 나온 홍콩판 <미워도 다시 한 번>인 <우견아랑>도 빼놓을 수 없 다. 주윤발 영화는 지금 보면 많이 유치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우리 젊은 날의 기억들이 영사된다.


명계남

그의 연기는 그냥 그의 일상같다. 최근엔 ‘라면 한 박스’ 때문에 선배 최종원에 조금 밀리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그는 타고난 연기자다. 선이 강한 최종원처럼 가끔씩 튀는 맛도 없는 진짜 말 그대로의 조연이다. 그 래서 때론 썰렁하기도 하지만.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 티베트 독립을 위해 애쓰는 과장, <돈을 갖 고 튀어라>의 썰렁한 프로킬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전태일 아버지 . 그의 연기를 더듬어보자. <l그 섬에 가고싶다> <세상 밖으로> <장미빛 인생> <너에게 나를 보낸다> <우중산책> <젊은 열대> <젊은 남자> <헤어 드레서> <테러리스트> <꼬리치는 남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진짜 사 나이> <내일로 흐르는 강> <돈을 갖고 튀어라> <정글스토리> <꽃잎> <코르셋> <쁘아종> <박봉곤 가출사건> <본투킬><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깡 패수업> <초록물고기>. 그만 하자. 이미 본 영화라도 그가 언제 나왔는지 를 기억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거다. 그를 발견하기 위해 본 영화 또 볼 필요까진 없고, 아직 보지 않은 게 있다면 영화를 보며 그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재미를 느껴보자. 조연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것도 색다른 감상 법이 될 것이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14일 제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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