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영남민심기행

부산,“정치? 이제 우리 일 아니오”

(사진/경선 부산유세에 앞서 고개 숙인 후보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지만 부산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딴 지역 잔치판이 될 대통령 선거에 굳이 투표하러 갈 필요가 있겠어요 . 어디 놀러가거나 일해서 돈이나 벌어야죠.” 택시기사 김동환(40)씨의 말이다. 한 마디 물음에 열 마디 답변을 쏟아내는 김씨의 푸념은 이번 신 한국당 후보 경선결과 부산지역 정서와 경제실상을 알지 못할 것으로 보 이는 이회창 후보가 선출된 데 대한 ‘허탈감’으로 요약된다. 김씨 자신 의 표현으로도 '허전하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선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이라는 토씨를 붙이긴 했지만 이곳의 문제와 정서를 대변해줄 후보가 없는데 굳이 ‘투표권’을 행사할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허전함은 이같은 결과를 낳게한 민주계 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번 당내 경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 한 민주계가 ‘자기만 살기에 급급해 갈가리 찢어지는 바람'에 결국 정치 적 고향인 부산을 홀대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는 이어 “이같은 정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시민을 가장 많이 상대하는 부산지역 택시기사들이 승객 과 함께 대부분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확신했다. 때문에 그는 설사 선거 당일 마음이 바뀌어 투표장에 가더라도 그나마 부산 발전에 적극성을 보 이는 후보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투표를 포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이같은 푸념은 곳곳에서 들린다. 이곳 민심을 완전히 대변하는 것 은 아니지만 신한국당 경선 이후 부산 하늘을 짙게 내리누르고 있는 정치 적 무관심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때문 에 정치권 관계자들은 지금까지 각종 선거 때마다 필요할 경우 ‘지역감 정’을 자가발전해서라도 ‘몰표’를 던지는데 서슴지 않았고 그래서 호 남쪽과 마찬가지로 투표율이 전국 선두그룹을 달렸던 과거 이곳 주민들의 투표행태가 이번 대선에선 최하위권의 투표참여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하 고 있다.

신한국당 부산시지부의 한 관계자는 이런 현상을 '정치적 박탈감'으로 설 명하려 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있을 때에도 부산시민은 나름 대로 반독재투쟁의 중심으로서 남다른 자존심을 지켜왔고 현정부 중반까 지만 해도 문민정부 탄생의 주역으로서 자긍심을 가졌지만 이제 그런 자 존심이나 자긍심 모두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무너진 자존 심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마저 없어져버렸으니 정치적 박탈감은 이곳 주 민의 지배적 정서로 자연스럽게 굳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허전함은 부산 출신인 박찬종씨의 경선 중도포기에 대한 아쉬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종합금융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 박아무개씨(38)는 “ 그나마 ‘지역정서’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중앙인물이던 박 고문 이 정치판 생리에 적응못해 도태된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왔다”고 말했다 .

한편 부산시민의 정치적 박탈감은 올초부터 불어닥친 최악의 불경기와 맞 물려 더욱 심각해진다. 일부 시민은 부산 경제를 떠받치다시피 해온 건설 업과 수산업계의 연쇄 부도 등 지역경제 위축에 따라 일단 경제대통령에 대한 소망을 피력하면서도 '누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 론에 쉽사리 빠져드는 것이다. 이는 경제 문제를 떠나 각 후보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인색한 평가로도 이어진다.

(사진/지난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던 환호는 4년 만에 허탈감으로 변했다.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소리도 서슴없다. )

건설업을 하는 이승호(37)씨는 “영남이든 호남이든 현재의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는 후보를 뽑겠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 나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이에 합당한 후보가 없는 것 같다”고 잘라 말 했다. 이씨는 “최근 여야 후보 3명의 텔레비전 토론회를 봐도 현재로선 최고 현안인 경제위기를 치유할 능력을 갖춘 후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며 “각 후보들의 정책까지 다분히 정략적이라고 판단돼 개탄스럽기까 지 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개탄에선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타 지 역 후보들에 대한 불신이 묻어난다.

이씨는 “최근 부산지역 동종업계 사람들을 만나도 올초부터 줄줄이 무너 진 부산 건설업계의 처참한 실정을 정치권에서 관심이나 갖겠느냐며 냉소 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태반”이라고 전했다. 그는 “지역실상을 모르는 각 당의 정책부재”고 특별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씨는 “만약 이번 선거 에 신한국당 경선결과에 불복한 일부 ‘용’들이 무소속으로 대거 출마할 경우 그야말로 젊은층의 반발과 함께 ‘정치염증 현상’까지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정답도 한마디 덧붙였다.

시청 근처에서 10여년째 식당업을 하는 김아무개(40·여)씨는 “요즘 시 장에 나가면 배추값이 얼마나 하는지를 각 당 후보들이 알기나 하는지 모 르겠다”면서 “찬거리를 사러 갈 때마다 분통이 터져 다가올 대선이 어 떻게 되든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여태양(34)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침체된 국내정세에 바람을 넣어줄 수 있는 참신하고 혁신적인 젊은 후보가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면서 “주변 에서 출향인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선거에 무관심해 지려는 경향이 만만 치 않더라”고 정리했다.

한편 30대를 중심으로 한 봉급생활자들 사이에선 '전혀 새로운 대안'에 대한 기대를 표시한다. 최창훈(30)씨는 이번 대선에서 “사표가 될망정 정당 후보에게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더이상 세 김씨의 집권 야욕에 국민들이 놀아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투표 불참 보다는 국민화합을 도모할 수 있고 기존 정치판의 대안이 될 만한 세력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한표를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더이상 영남권에서 후보 가 안 나온 것에 대해 “한국 정치발전을 위해 무조건 환영한다”고 강조 한 최씨는 “시민·재야단체가 독자후보를 내세워 참신한 정책을 제시할 경우 지역성을 떠나 지지를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산=최익림 기자/ 한겨레사회2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