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영남민심기행

대구, "신한국당도 양 김씨도 다 싫다”

(사진/합동연설회를 가득 메운 신한국당 대구·경북 대의원들. 그러나 대구에선 "신한국당은 죽어도 안 찍겠다"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정도다.)

무더위가 계속된 7월31일 대구의 기온은 36도까지 올라갔다. 전국 최고였 다. 오랜만에 들른 방문객을 대구는 그렇게 후끈한 열기로 맞아주었다. 3 4년 만에 비영남권 대통령이 예견되는 정치상황에서 대구는 어느새 대선 길목의 분수령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대구사람들의 마음은 작열하는 태양 과는 달리 얼음장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경제나 먼저 살리라 하소”

맨 먼저 대구민심으로 들어가는 첫 장소로 택한 곳은 서문시장이었다. 저 녁 장을 보러온 사람들로 장터는 꽤나 붐볐으나 예전같은 활기는 현저히 떨어졌다. 경북의 모든 산물이 총집결하는 대구 최대 시장으로, 몇년 전 만 해도 만원전철처럼 사람들이 빽빽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가 도 시장거리도 그리 붐비지 않는다. 반찬거리 좌판을 늘어놓은 아주머니 들에게 이야기를 걸어도 장사에 방해되기보다는 심심풀이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다들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정오까지 마수걸이 도 못하는 집이 허다하다”고 한참 신세타령을 해댄다. 대통령 선거에 대 한 물음에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는다. 대구사람들 이 원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딱히 마음을 끌 인물이 아직 없기 때문이리라. 30년간 서문시장에서 메리야스를 팔아왔다 는 이아무개(70·여)씨는 “그저 누가 되더라도 마음 편히 잘살게 해주면 좋겠소”라고만 말했다. 그 가게 앞에서 20년 동안 건어물 좌판으로 4남 매를 출가시키고, 이제 막내아들만 남았다는 한 아주머니(58·여)도 “누 가 돼도 상관없죠”라고 말하는데 뒤에서 다른 아주머니 한분이 토를 단 다. “김대중이가 되면 안 되지.” “왜요?” “아, 김대중이 되면 경상 도는 아예 절단이구마, 지금도 이런데.” 중년층 이상의 맹목적 반DJ 정 서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시장 외곽 주택가 골목길엔 중년 남자 2명이 러닝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세탁소와 이발소를 뒤로 한 채 마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그 틈에 끼었다. 그들은 대뜸 “신한국당은 죽어도 안 찍습니다. DJ 도 싫고, JP도 싫고. 조순이 나온다 카는데(그러는데) 난 고마(그만) 조 순 찍을랍니다. 3명만 나오마(나오면) 그냥 기권하고.” 집세 내기도 버 겁다는 이들은 “전두환 나오마 전두환 찍겠다는 사람 많심데이(많습니다 )”라며 무슨 공공연한 비밀이라도 가르쳐준다는 표정이다.

젊은 사람들은 어떨까 해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대구백화점 앞 동성 로로 나갔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소매없는 티셔츠, 착 달라붙 은 핫팬츠, 미니스커트, 구본승 샌달, 무스 바른 머리 등 배꼽티가 잘 보 이지 않을 뿐 젊은이들의 겉모습은 서울 명동이나 종로 한복판과 다를 바 없었다.

“무소속 찍고 싶심더”(24·대구대 1) “누가 돼도 내캉은(나와는) 아무 상관 없잖아예”(23·여·영남대 4) “이인제가 됐시마(됐으면) 이인제 찍을라꼬 캐쌌는데(했는데)”(31·상업) “아직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안 보이네예”(26·회사원) “야당에서 DJ, JP말고 딴 사람 나오면 대구사람 들이 많이 찍어줄 텐데”(30·여·주부).

한마디로 대구사람들은 지금 지독한 무력감과 기존 정치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찬 듯하다. 이는 잘 모르는(아니면 일부러 지역감정을 조장하려는 의도를 지닌) 언론들이 떠드는 ‘영남후보가 없기 때문’은 전혀 아니다. 대구에서 만난 수십명의 사람들 중 “영남후보가 안 나와서 섭섭하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하나같이 “우리 고장 사람 아니면 어 떻습니까? DJ도 상관없습니다. 마음 핀케(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마(사람 이면) 됐지.”


마음을 편하게 하는 후보가 없다

대구사람들은 그 ‘마음 핀케 해주는’ 후보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 다. 대구 섬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내일 부도날 게 걱정인 사람들이 태 반인데 대통령 선거를 돌아볼 여유가 어디 있나, 대구는 아직까지 섬유가 지역경제를 좌우하는데 다섯손가락 정도를 뺀 나머지 회사는 모두 한달에 수천만원씩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그냥 공장을 굴리고 있다. 은행에서 법 정관리를 받아주지 않으니,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인데 조만간 대구지역 전반에 걸쳐 엄청난 파국이 올 수도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GRP(지역총생산) 전국 최하위, 부도율 전국 1위 등 불명예 기록을 수년 동안 연속 기록하고 있는 대구가 활력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대구에 서 건설업을 하고 있는 서아무개(50·남구 대명동)씨는 “지역차별은 위 정자 저그끼리(저희들끼리) 한 기지(것이지), 우리가 혜택본 기 뭐 있노, 한개도 없다. 위천공단도 부산사람 반대 때문에 흐지부지됐지, 삼성 승용 차도 대구 온다 캐샀디만(해쌓더니만), 상용차만 오고, 승용차는 부산 내 리갔꼬. 이제 제3도시도 인천한테 뺏길 가능성도 많다카이. 노 대통령 말 기부터 내리막살이가 시작되디마 인자 더 내리갈 때도 없는기라. 옛날에 는 저그 집이라 눈치 보느라꼬 뒷전으로 빼놓디만, 인자는 완전히 찬밥 신세라카이. YS 될 때 많이 도와줬는데 시키놓고 보이 사정이다 뭐다 해 가꼬 대구사람 다 쫓아 내뿌고, 가스폭발 나고, 완전히 절딴 내뿟다 아이 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 같은 분위기로 봐선 대구에선 누구도 환 영받지 못한 채 투표율마저도 뚝 떨어질 분위기다. 하지만 결국 야당쪽에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여(與)편향, 보수성향’이라는 그동안의 오랜 관성이 결국 신한국당의 손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 다. “대구·경북은 신한국당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회창에 대한 이 미지는 나쁘지 않다. 좀더 화끈한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더 두고 봐야 안 되겠나”(문종웅·52·의사·수성구 지산동)라고 말했다. “마땅 히 찍을 사람이 없는데 이회창이 그래도 깨끗하지 않나, DJ나 JP나 하도 오래 정치를 했던 사람이라 대통령 되면 자기 밑에 그동안 힘써줬던 사람 들, 한번씩 다 써줘야 되고.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지 않겠나? 신한 국당은 싫지만, 이젠 3김말고 딴 사람 찍고 싶다”(이도형·51·전 공군 대령·북구 고성동).

그런데 이회창 후보는 최근 두 아들의 병역기피로 ‘대쪽’ 이미지에 치 명적인 손상을 입고 있다. “아무도 이회창씨 말 안 믿습니데이. 하지만 보수적이고 더이상 변화가 싫은 40대 이상, 중산층 이상의 대구사람들은 그거 알면서도 이회창 많이 찍을겁니더.” 대구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는 한 상인(28)의 말이다. 실제로 야당 대구시 지부쪽에서 우려하는 것 도 아들의 병역기피 문제가 도리어 동정표로 불똥이 튀어 오히려 여당에 유리해지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박근혜씨 유세면 JP 바람이 분다

(사진/예전의 활기를 찾기 어렵게 된 서문시장. 경제나 먼저 살리라는 것이 대선후보들을 향한 대구시민들의 주문이다. )

경북대 정외과 윤용희 교수는 “현재 야권 표는 15%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여진다. 다만 야권 단일화가 된다면 30∼35%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 이다. 반신한국당 정서는 아직도 강하지만, 이회창과 신한국당을 연결짓 지 않고 이회창 개인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이 후보 입장에선 제로섬 상태에서 시작하다 보니 DJ나 JP보다 오히려 유리한 입장이다. 여당이 이 정도로 못하면 정권이 교체되는 게 당연한데도 정권교체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국민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있다. 특히 대구는 더하다.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못 바꾸 는 것이다”고 최근의 대구정서를 분석했다. 현재 대구·경북의 구심점이 될 만한 정치적 맹주는 없다. 김윤환, 박태준, 박철언, 강재섭 등 이름은 오르내리지만 어느 누구하나 대구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온전히 받고 있지 는 못하다. 그래서 대구사람들은 각 당 후보가 이들 유력인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것을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 듯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이 꺼지지 않는 이유도 그들 마음속에서 박정희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번 여당 경선장이 박정희 추모 대회로 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권억선(75·수성구 지산동)씨는 “유신, 독재 등 잘못한 점은 분명 있지만 그래도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는 말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표현했다.

지난 총선 때 자민련이 대구에서 압승을 거둔 것도 당시 지하철 사고 직 후여서 반신한국당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 과 김종필이라는 연결고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은 어쩌면 당연하다. 대구지역 민간 여론조사 기관인 ‘온 조사연구소’ 위현복(38) 소장은 “ JP가 꾸며대기 나름인데, 만일 박근혜가 대구에 와서 연설만 한번 하면 J P 몰표가 쏟아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반적인 구도에 대해 서는 “각 정당에서야 나름대로 분석하겠지만, 아직은 대부분 부동표로 봐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여론조사는 사실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정치권 지각변동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그 어느 지역보다 높은 곳”이 라며 “DJ는 아예 괄호 밖이었던 예전과 달리 배척하는 분위기는 많이 사 라졌고, JP 역시 상당한 변수가 작용할 수 있는 후보다.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며, 각자가 대구 지역에 내밀 수 있는 카드 한장 씩은 갖고 있다”고 말했다.


DJ 배척 분위기 많이 사라져

하지만 그는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대구는 지금 아무 비전 이 없는 도시인데”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 막 히는 것 빼곤 달라진 게 없는 도시, 쌍그러니 식은 그믐날 달밤 같은 도 시가 대구라는 것이다.

대구사람들의 우울함을 가슴에 묻은 채로 대구를 떠나는 날, 그간 대구사 람들로부터 들은 한숨, 탄식 때문이었을까? 동대구 터미널 입구에 있는 홍의장군 동상이 은퇴한 권투선수의 뒷모습처럼 처량하게만 보인다. 신바 람이 없는 도시, 김 샌 도시.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들이 이 도시에 무엇 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대구는 아직 주인이 없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14일 제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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